[작가 한상복의 남자이야기]<51>명절은 이제 남자들의 무덤이 되어 버렸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2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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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은 여자들의 몸으로 온다. 아내는 보름 전부터 무릎과 어깨가 아프다고 아우성이었다.

남자는 속이 탔지만 내색할 수 없었다. 아내한테 섣부르게 위로의 말을 했다가는 ‘그럼 자기네 집에 안 내려가도 되는 거지?’ 분위기로 몰릴 가능성이 다분했다. 그게 아니면 ‘자기 체면밖에 모르는 인간’이라고 욕을 먹거나.

총각 때는 여자들의 명절 증후군을 이해할 수 없었다. 누이들이 어머니에게 푸념을 늘어놓을 때마다 괜히 응석을 부리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까짓 음식 만드는 게 뭐가 대단하다고, 고작해야 하루 이틀 일 좀 하는 것 가지고….’ 결혼을 한 뒤로 여자들 세계를 약간 이해하게 됐다. 전문가의 분석을 보니까, 기혼여성이 겪는 명절 스트레스가 ‘사업상 어려움’이나 ‘가까운 친구의 배신’과 비슷한 수준이라고 한다. 시댁을 비롯한 인간관계 갈등이 중요한 원인이라는 것이었다.

남자는 하염없이 이어지는 눈발을 바라보다가 결심을 했다.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버지, 눈이 많이 와서 길도 미끄럽고 이번엔 휴일이 짧아서 아무래도….”

아버지는 흔쾌히 “오지 말라”고 해주셨다. 죄송스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명절을 지내고 나서 한 달 이상 시달리는 사태를 이번에는 피하고 싶었다. 아이를 좋은 유치원에 보내지 못하게 됐다고 예민해져 있는 아내인데….

아내는 뛸 듯 기뻐했다. 곧바로 컴퓨터에 매달려 해외여행 검색에 나섰다. 아프다던 무릎과 어깨는 어떻게 된 것인지.

일사천리로 여행 계약을 끝내고 친정에 전화를 걸어 자랑하는 아내를 보면서, 남자는 슬며시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눌러 참았다.

여자들에겐 인간관계가 가장 큰 스트레스라고 한다. 남자들에게는 일 자체가 중요하지만, 여자들에게는 누구와 함께 일하는지가 첫 번째라는 것이다. 함께 일하기가 가장 껄끄러운 상대가 시어머니라는 얘긴데 두 사람이 어쩔 수 없이 맞붙어야 하는 때가 바로 명절이니.

남자는 여행 짐을 꾸리느라 부산을 떠는 아내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한쪽은 어머니, 다른 한쪽은 아내…. 가부장제가 내리막을 타고 여자들의 입김이 세지는 이제, 명절은 남자들의 무덤이 되어버렸다. 아버지는 어머니한테 얼마나 시달리고 계실까. 누구 맘대로 오지 말라고 그랬냐고.

금요일 밤. 여행 꿈에 부푼 아내가 짐을 점검하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남자는 인터폰 화면을 흘낏 쳐다봤다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음식을 바리바리 싸든 어머니, 그 뒤로 겸연쩍은 표정의 아버지. “너희가 못 내려온다고 해서….”

남자는 아내의 도끼눈을 마주 봤다. 여행이고 뭐고, 평생 들볶일 일이 터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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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복 작가
#남자#명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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