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인균의 우울증 이기기]왕따 가해자도 우울증에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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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년 1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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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괴롭힌 아이들 뇌도 손상… 자살 위험도 피해자들과 비슷해
어른들, 외면 말고 모두 보듬어야

류인균 이화여대 약대 석좌교수·정신과 의사
류인균 이화여대 약대 석좌교수·정신과 의사
얼마 전 중학생의 왕따 문제를 그린 TV 단막극을 보고 지인들과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모두들 “요즘 아이들 참 안됐다”, “우리 때는 그 정도는 아니었지 않나”, “세상이 바뀌었나”라며 안쓰러워하고, 걱정스러워했다. 하지만 누구도 쉽사리 해결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지는 않았다. 나는 이미 어른이 됐고, 내 아이가 왕따나 괴롭힘을 당하고 있지 않으니 우선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미국 하버드대 연구진에 따르면 또래에게 왕따나 괴롭힘을 당하는 아이들은 괴롭힘을 당하는 당시는 물론이고 성인이 된 이후에도 우울증이나 다른 정신적인 후유증에 시달릴 확률이 높다고 한다.

젊은 성인 수백 명을 대상으로 한 이 연구의 내용을 살펴보면, 실제 왕따나 괴롭힘을 당했던 사람의 경우, 뇌의 좌반구와 우반구 사이의 정보를 전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진 뇌량 등 특정한 뇌 영역에 손상을 받은 흔적이 있다고 한다. 그러니 남을 왕따시키거나 괴롭혀서는 안 되는 이유들은 단순히 옳지 않은 일이니까, 혹은 당하는 친구가 너무 힘들어 하니까 등 언뜻 생각해 본 것들보다 훨씬 더 많고 심각한 것일 수 있다. 왕따를 시키면 안 되는 이유를 들라고 하면 100가지가 훨씬 넘지 않을까.

여기 또 다른 연구가 있다. 핀란드 연구진 주도로 청소년 2000명 이상을 대상으로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왕따나 괴롭힘을 당한 아이들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가담하거나 혹은 소극적이지만 방관했다는 기억을 가지고 있는 아이들도 왕따 당한 아이들과 비슷한 정도로 자살에 대한 위험도가 높아진다고 한다. 다시 말해, 괴롭힘을 당한 아이들처럼 괴롭힘을 주도한 아이들도 뇌에 비슷한 상처와 흔적이 남는 것이다.

인간의 뇌 발달은 동물과는 다른 특이한 단계를 거친다. 태어날 때부터 이미 시각 및 운동 기능과 생존에 필요한 기본적인 욕구를 담당하는 뇌 영역은 상당 부분 발달돼 있다. 하지만 이런 1차적인 기능을 조절하고 관장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전전두엽 등 이른바 고위 뇌 영역은 아직 미성숙한 상태다. 이들 영역은 청소년기 및 초기 성인기에 이르는 시기까지 지속적으로 발달이 진행된다.

인간으로서 온전하고 합리적인 판단 기능을 하기 위해서는 참으로 오랜 기간 뇌가 균형적으로 발달해야 한다. 이에 따라 청소년기 뇌는 이미 모두 발달돼 있는 감각과 욕구 등을 담당하는 뇌 영역과 1차 기능들을 조절하기에는 아직은 미성숙한 전전두엽 사이에서 그야말로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고 있다. 감사하게도 우리의 뇌는 성장과정에서 훈육과 주변 환경의 적절한 자극 등을 통해 온전한 인간 본연의 뇌로 안착하게 된다. 이러한 인간 뇌 발달의 특성은 우리가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왕따나 괴롭힘의 문제에 많은 시사점을 줄 수 있다.

청소년의 뇌는, 개인적인 차이는 있겠지만, 대체로 인지적인 결정이나 도덕적인 판단, 욕구의 조절 등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전전두엽 기능이 미성숙한 상태다. 왕따나 괴롭힘에 가담하는 가해자나 혹은 그냥 지켜보고만 있는 방관자의 역할을 하고 있는 우리의 아이들은 그런 행동을 하고 있는 순간에 자기가 하는 행동이 옳은지 그른지 좋은지 나쁜지 어른 만큼 판단을 잘하지 못한다고 보면 된다.

단순히 누군가를 왕따 시키는 동안에는 자신만은 왕따 당하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가담하고 혹은 방관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들이 성장하여 온전한 판단 기능을 하는 뇌를 갖는 시기가 되면 본인이 예전에 저지른 행동들에 대해 경악하고 많이 괴로워할 수 있다.

이제 어른이 된 우리를 생각해 보자. 지금은 후회하고 생각만 해도 낯 뜨거운, 과거에 모르고 저질렀던 잘못된 행동이 누구에게나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철없던 중학생 시절에 누군가에게 했던 못된 행동으로 후회하고 계속되는 죄책감에 우울해 하는 성인이 있을 수 있다.

실제로 진료실에서 만나는 환자 중에는 그런 사례를 드물지 않게 보게 된다. 왕따나 학교폭력 피해자뿐 아니라 가해자에게도 즉각적인 도움과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다. 우리의 관심은 왕따를 당하는 아이들에게도, 또 왕따를 시키는 아이들에게도 모두 필요하다.

청소년기에 미성숙한 전전두엽을 대리하는 역할은 사실은 어른들의 몫이다. 성숙한 전전두엽을 가지고 있는 어른으로서, 적절하고 합리적인 판단을 하는 모습을 보여 줌으로써 청소년들의 뇌가 궤도에서 이탈하지 않는 발달 단계를 거치도록 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뜻이다.

요즘 왕따나 집단 괴롭힘과 같은 학교 폭력이 너무 심각해지고 있다고 생각만 한다면, 우리 때는 안 그랬는데 세상이 변한 것 같다고, 심지어 요즘 아이들이 무섭다고만 말하기만 한다면 어른으로서의 책임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무한경쟁 사회에서 우리의 아이들이 꼭 승자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전전두엽 발달의 지적인 측면만을 강조하고 있고, 감성적인 측면의 발달에 대해서 충분한 고려를 하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겠다.

우리의 아이들은 별 생각 없이 남을 괴롭히고, 왕따 시키고, 또 그런 것들을 방관자로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부모들은 내 아이가 아니니까 다행이지, 무심히 보고 지나갈 수도 있겠다.

하지만 우리가 걱정해야 할 진짜 문제는 우리의 아이들은 스스로의 판단을 가지는 시기가 되었을 때 자신들이 했던 행동들 때문에 무섭고, 두렵고, 우울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어쩌면 정상적인 뇌 발달의 궤도에서 이탈할 정도의 영향을 이미 받았을 수도 있겠다. 왕따를 방관해서는 안 되는 절실한 이유다.

류인균 이화여대 약대 석좌교수·정신과 의사
#왕따#가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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