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시대-인사가 만사다]<7> 외교통상부 장관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12월 3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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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4강’ 고차방정식 풀 능력-배짱 갖춰야

2001년 3월 초 이정빈 당시 외교통상부 장관은 한미 정상회담을 코앞에 두고 예상치 못한 위기에 직면했다. 한미 정상회담을 열흘 앞두고 열린 한-러 정상회담 공동성명 내용에 미국이 강하게 항의한 것이다. ‘탄도탄요격미사일(ABM) 협정을 보존 강화한다’라는 한 줄이 문제가 됐다.

당시 갓 출범한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미사일방어(MD) 체제를 추진하기 위해 이에 걸림돌이 되는 ABM 협정의 개정 또는 폐기가 필수적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동맹국인 한국이 ABM 협정의 보존 강화를 지지한 것은 미국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했다. 자질 논란에 휩싸인 이 장관은 해결 과정을 설명하려다 외교 관례상 비공개가 원칙인 정상회담의 세세한 교섭 내용까지 공개하고 말았다. 이 장관은 이 일로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박근혜 정부의 첫 외교부 장관이 직면하게 될 외교적 현실은 이 전 장관 때보다 훨씬 복잡하고 엄중하다. 체제가 불안정한 북한 김정은 정권의 도발 가능성과 ‘주요 2개국(G2) 시대’의 미중 패권 경쟁, 일본 정부의 급속한 우경화 등 복잡한 현안이 곳곳에 지뢰처럼 잠복해 있다.

① ‘고차방정식’ 풀 비전 있는 전략가

박근혜 정부의 외교 수장에게 요구되는 자질로는 무엇보다 이런 대외 환경 속에서 복잡한 현안을 큰 비전을 담은 그림 속에서 일목요연하게 풀어 낼 외교적 역량을 갖춰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당장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은 현 이명박 정부보다 미래 지향적인 대북정책을 공약했다. 이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외교부 장관은 주변국들과 의견을 조율하고 협조를 이끌어 낼 능력이 필요하다.

외교는 다른 분야와 달리 국가 지도자가 직접 현안을 챙기는 ‘대통령 어젠다’로 분류된다. 더구나 최근 정상회담 빈도가 크게 늘면서 대통령이 외교의 주역으로 직접 나서는 시대가 됐다. 외교부 장관은 그런 대통령의 외교철학을 단순히 이행하는 것을 넘어 좀더 적극적으로 외교정책의 흐름을 이끌어 가는 전략가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주문이 많다.

그렇지 못하면 청와대가 주도하는 외교안보 어젠다의 뒤치다꺼리에만 매달리거나 의전 챙기기에만 머무르는 외교부가 될 수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한국을 방문하는 해외 정상의 공항 영접 같은 세세한 사항까지 직접 챙기는 스타일이다. 그런 이 대통령은 올해 8월 독도를 방문할 당시에도 계획을 미리 확정한 뒤 김성환 장관에게 이를 사실상 ‘통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② 대통령과 토론하고 설득할 수 있어야

박근혜 정부에서는 신설될 대통령국가안보실과 외교부가 어떤 관계로 설정되느냐에 따라 외교부 장관에게 요구되는 역할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전문가들은 외교·국방·통일 분야의 컨트롤타워 기능을 하게 될 국가안보실의 권한이 노무현 정부 시절의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이상으로 커질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이럴 경우 각 부처 장관은 그 지시를 받아 수동적으로 이행하는 실무형 혹은 관리형 업무에 안주하게 될 수도 있다.

외교부의 한 간부는 “장관이 대통령과 원활히 소통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라며 “정부 내 여러 목소리를 균형감 있게 조율해 가면서 어떤 정책이 국익에 더 도움이 되는지를 놓고 대통령과 토론하고 때론 설득할 수도 있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익명을 요청한 한 학자도 “넓은 시야를 갖고 외교의 큰 그림을 그려 낼 수 있는 비전의 소유자가 새 장관이 됐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③ 위기 관리 능력은 필수

예상치 못한 상황에 대처하는 위기 관리 능력도 필수적이다. 외교부 장관은 북한의 도발뿐 아니라 수시로 터지는 각종 영사 사건에서도 신속한 대처와 판단을 요구받는다. 홍순영 전 장관은 1999년 말 중국이 탈북자 7명을 강제 북송한 것을 막지 못한 책임을 지고 물러났고, 한승수 전 장관은 중국이 한국인 마약사범을 처형한 사실을 사형 집행 이후까지도 모르고 있다가 거센 여론의 비판에 직면했다. 박정수 전 장관은 1998년 7월 ‘한-러 외교관 맞추방’ 사건으로 취임 5개월 만에 경질되는 굴욕을 당했다.

④ 전 세계 2000명 이끄는 조직 장악력

외교부는 다른 부처에 비해 조직 관리가 쉽지 않은 곳이다. 외무고시를 통해 선발된 외교관들의 폐쇄주의와 엘리트주의, ‘그들만의 리그’에 포함되지 못한 외부 인사를 향한 텃새가 심한 곳이다. 전 세계 해외 공관에 퍼져 있는 직원 2000여 명이 느끼는 물리적 거리감도 리더십 발휘를 어렵게 하는 요인이다. 이 때문에 새 장관은 외교부라는 조직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이들을 이끌 통솔력을 가져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주문했다.

교수 출신의 윤영관 전 장관은 학자적 식견과 소신에도 불구하고 장관으로서 조직 장악력의 한계를 드러낸 사례다. 노무현 정부에서 이른바 ‘자주 외교’를 앞세운 청와대 NSC 인사들과 자주 충돌했던 윤 장관은 점차 입지가 좁아졌다. 심지어 일부 간부는 장관을 무시하고 이종석 NSC 사무차장을 비롯한 청와대 실세에게 직접 줄을 대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⑤ 반드시 외교관 출신일 필요는 없어

이 때문에 외교부 조직을 이해하려면 일단 직업 외교관 출신이 유리하다고 외교부 인사들은 말한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외부 인사라도 충분한 능력을 갖고 있다면 외교부를 지휘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반론한다. 윤덕민 국립외교원 교수는 “한국의 외교 환경이 급변하고 있는 만큼 외교부의 인력과 체제도 개혁이 필요한 시점”이라며 “관료주의와 관성에 젖지 않은 인물이 외교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 가는 데 더 유리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미국의 경우 역대 미국 국무장관 중 직업 외교관 출신은 찾아보기 힘들다. 최고의 전략가로 꼽히는 학자 출신의 헨리 키신저 전 장관은 말할 것 없고, 조지 W 부시 행정부에서 국무부 직원들에게 인기가 높았던 콜린 파월 전 장관은 군 출신, 콘돌리자 라이스 전 장관은 대학 교수 출신이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에서도 힐러리 클린턴 장관은 변호사와 상원 의원을 지내다 국무장관에 발탁됐다. 그 후임이 될 존 케리 지명자도 대선 후보로 나섰던 정치인이다.

이정은 기자 light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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