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21>모래밭에서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10월 3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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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밭에서
―이진명 (1955∼ )

내가 많이 망가졌다는 것을
갑자기 알아차리게 된 이즈음
외롭고 슬프고 어두웠다
나는 헌것이 되었구나
찢어지고 더러워졌구나
부끄러움과 초라함의 나날
모래밭에 나와 앉아 모래장난을 했다
손가락으로 모래를 뿌리며 흘러내리게 했다
쓰라림 수그러들지 않았다
모래는 흘러내리고 흘러내리고
모래 흘리던 손 저절로 가슴에 얹어지고
머리는 모랫바닥에 푹 박히고
비는 것처럼
비는 것처럼
헌것의 구부린 잔등이 되어 기다리었다

모래알들이 말했다
지푸라기가 말했다

모든 망가지는 것들은 처음엔 다 새것이었다
영광이 있었다

영광, 영광
새것인 나 아니었더라면
누가 망가지는 일을 맡아 해낼 것인가
망가지는 것이란 언제고 변하고 있는 새것이라는 말
영광, 영광

나는 모래알을 먹었다
나는 지푸라기를 먹었다


화자의 외롭고 슬프고 어두운 마음 상태를 세세히 그린 시다. 언제부턴가 자신이 아무 쓸모없고 볼품없는 ‘헌것’이 돼 버렸다고 생각하게 된 화자는 망연히 발길을 옮기다 동네 놀이터의 모래밭에 들어가 쪼그려 앉는다. 서 있을 기운도 없었겠지만, 문득 그 자리에서 머리를 길바닥에라도 처박고 가슴을 쥐어뜯고 싶을 정도로 마음이 힘들었을 것이다. 마침 모래밭이어서 다행이다. ‘모래는 흘러내리고 흘러내리고’. 손가락 새로 흘러내리는, 마치 시간의 입자 같은 모래알들의 하염없는 감촉이, 아마도 시간에 상처 입은 화자의 마음을 쓰다듬어 줬으리라.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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