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rrative Report]“짐에 치이고 사람에 치이고… 그래도 날 기다리는 곳 있어 웃는다”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6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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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126곳 뜀박질…그런데 주문해놓곤 왜 왔냐 물어보시면…
한국에 택배서비스 들어온 지 20년… 3년차 택배기사의 하루

트럭에 짐을 싣는 상차(上車) 작업은 오전 6시쯤 시작했다. 일을 마치는 데는 꼬박 2시간이 걸렸다. 지난달 24일 경기 분당의 물류센터 주차장에 도착한 김종성 씨(38)는 운전석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택배기사의 긴 하루는 이렇게 시작됐다. 그는 오른쪽 귀에 블루투스용 헤드폰을 꽂은 후 점심용 김밥 한 줄과 물 한 통을 아이스박스에 담았다.

이날 할당받은 배송장을 세어 보니 126장. 그건 하루 동안 방문해야 할 가구와 사람 수를 뜻했다. 배달시간을 오전 9시부터 오후 7시까지로 잡으면 시간당 12.6개, 건당 4.7분이 김 씨의 ‘데드라인’이다. ‘문을 열어주니 택배기사가 틈새로 물건을 던지고 가더라’라는 고객 불만은 이런 환경에서 나온다. 김 씨는 이 일을 시작하며 안전벨트를 맨 적이 없다. 위험한 줄은 알지만, 벨트를 매고 푸는 1, 2초마저 아까운 것이 택배기사의 세계다.

숨을 고른 그는 가속페달을 밟으며 배송장 첫 장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고객님, 택배입니다.”

뚝.

김 씨는 재다이얼 버튼을 눌렀다. 용인시 수지구 성복동의 한 아파트 출입구로 핸들을 꺾는 동안 신호가 다시 울렸다.

“네, 택배인데요.”

뚝.

수화기 건너편은 무정했다. 휴대전화를 사이에 두고 숨바꼭질이 서너 차례 이어졌다. 김 씨는 “요즘 사람들은 모르는 번호가 뜨면 전화를 잘 받지 않는다”고 했다. 통화가 된다고 하더라도 대부분의 반응은 귀찮다는 식이다.

분당에서 7년째 택배업체를 운영하며 김 씨를 고용한 유관기 씨(56)는 “한국 사람들이 택배에 너무 익숙해졌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10년 전만 하더라도 택배를 받는 게 특별했지만 어느덧 일상이 되다 보니 주문 하루 만에 물건을 받는 편리함과 고마움을 모르게 됐다는 뜻이었다. 대신 고객의 요구사항은 더 많아졌다.

통화를 포기한 김 씨는 휴대전화에 저장해 놓은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최대한 친절하게.

‘고객님, GS샵입니다. 주문하신 물건은 경비실에 맡겨 두었습니다. 들어가실 때 꼭 찾아가세요. *^^*’

김 씨에겐 ‘헛걸음’이 가장 싫은 단어다. 그로 인해 5분 단위로 촘촘히 짜놓은 동선이 흐트러진다. 배달 시간이 지체되고 고객들의 항의가 늘어나며 퇴근 시간이 늦어진다. 1인 가구가 늘며 택배기사들이 헛걸음칠 확률도 점점 높아지고 있다. 집에 있어도 문을 열어주지 않는 경우가 잦다. 이를 피하기 위해 사전 연락은 필수지만 휴대전화조차 제때 받는 경우가 드물다는 게 택배기사의 또 다른 고민이다. 요즘에는 업체 간 서비스 경쟁이 붙어 배달 후 확인 전화를 하는 업체가 생겨나고 있다.

김 씨는 트럭 뒷문에서 꺼낸 상자를 들고 101동 엘리베이터를 향해 종종걸음 쳤다.

김 씨는 홈쇼핑과 인터넷몰 업체인 GS샵을 전담하는 3년차 택배기사다. 처음에는 물건만 전달하면 되는 줄 알았다. 착각이었다. 택배업은 매일 100여 명의 고객을 모셔야 하는 일종의 ‘접객업(接客業)’이었다. 그러다 보니 김 씨는 “손만 내민 채 물건을 낚아채는 손님에게 상처를 많이 받았다”고 했다.

이런 고객도 있었다. 전화해서 오전 10시 20분까지 와달라는 고객, 바로 옆 동에 있는데 왜 당장 올 수 없냐는 고객, 미리 연락하고 집 앞에 왔는데 5분 전 깜빡하고 외출했다는 고객…. 인터넷쇼핑 중독자가 많아지며 자신이 뭘 구매했는지 모르고 왜 왔냐고 따지는 고객은 그중 가장 황당한 경우라고 김 씨는 말했다.

오후 4시, 김 씨는 차를 세웠다. 며칠 전부터 이 아파트는 택배 차량 출입을 금지했다. 인근 단지에서 한 택배 차량이 어린아이를 친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택배기사를 가장한 각종 범죄가 언론에 오르내리며 고객들이 택배기사를 보는 눈빛에도 의심과 경계가 가득 담기게 됐다. 처음에는 서운했지만 김씨는 되레 다행이라고 했다. 서로 삭막해지는 게 배달시간을 줄이는 방법이었다. 언제부턴가 김 씨는 사람을 처음 볼 때 눈이 아닌 손부터 보게 됐다.

잠시 후 그에게 문자메시지가 도착했다.

‘경비실에 좀 맡겨 주세요.’

김 씨는 한숨부터 쉬었다. 용건만 있는 문자메시지에는 김 씨를 위한 배려가 조금도 없었다. ‘대체 어떤 물건을 어느 경비실에 맡겨 달라는 건지….’ 전화해서 물을 수 있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물건만 가져오면 되지 왜 자꾸 전화질, 문자질이냐”는 항의를 종종 받기 때문이다. 그는 문자메시지의 발신인을 찾기 위해 배송장 126장을 뒤져야만 했다.

3년 전 인테리어 가게를 그만둔 그는 친구 따라 택배기사가 됐다. 남의 눈치 보지 않고 뛴 만큼 돈을 버는 정직한 직업이라 생각했다. 진입장벽도 낮았다. 영업용 차량 번호판과 화물운전 자격증, 건장한 신체만 있으면 개인 사업자등록증을 얻을 수 있다. 때마침 온라인쇼핑과 홈쇼핑 시장이 커지며 택배업도 호황이었다. 3년 전 하루 90건이었던 일감은 요즘 평균 140건으로 늘었다.

국내 택배업은 올해로 20년을 맞았다. 1992년 6월 한진택배의 서비스가 시작이었다. 한국통합물류협회에 따르면 2010년 기준 연간 택배 물량은 13억7400만 개, 시장 규모는 3조3300억 원에 이른다. 1997년 외환위기나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에도 택배 물량은 오히려 늘었다. 그래서 택배업은 불황에도 끄떡없는 업종으로 꼽힌다.
일감은 느는데 이상했다. 지난 10년간 배달수수료는 물건 크기와 무게에 따라 850∼3000원으로 동결. 매월 유류(油類)비, 휴대전화 요금, 개인사업자라는 이유로 부담해야 하는 각종 세금을 빼면 남는 돈은 배달 수수료의 절반이었다. 새벽부터 밤까지 일해도 하루 7만∼8만 원이 손에 남았다. ‘처음에는 더럽고 치사해서, 1년 지나면 돈벌이가 안 되는 걸 알고, 3년이 지나면 몸이 힘들어서 택배업을 그만둔다’는 선배 택배기사들의 말이 괜한 푸념은 아니었다.
매년 새로운 업체들이 택배업에 뛰어들며 평균 배달 단가는 1997년 4734원에서 현재 2338원으로 떨어진 상태다. 신생 회사들이 출혈 경쟁을 벌이는 탓에 배달 단가와 수수료는 점점 내려가고 있다.
온라인몰과 홈쇼핑으로 각종 생필품이 거래되면서 택배기사의 육체적 고충도 커졌다. 이날 김 씨의 트럭 내부는 ‘작은 마트’를 방불케 했다. 각종 식품부터 의류, 생활용품, 잡화, 캠핑용품까지 다양했다. 김 씨에게 가장 곤혹스러운 물품은 홍삼선물세트, 두유, 생수, 쌀, 김치, 라텍스(침구세트). 업계 용어로 ‘똥짐’이라 불리는 것이다. 김 씨는 “무거운 것보다 더 난감한 것은 브래지어를 비롯한 속옷을 여성 고객에게 전달할 때”라며 “배달한 물품이 맞는지 확인할 때 고객과 기사 모두 어쩔 줄 몰라 한다”고 했다.
최근에는 온라인쇼핑몰 물품이 택배 물량의 50.7%를 차지하고 있다. 택배업 초창기에는 전보나 서적 등을 주로 배달했지만 요즘에는 온라인에서 거래되는 각종 생필품과 물품을 배달하고 있다.

캠핑장비부터 쌀, 생수 그리고 가슴을 크게 보이게 해주는 원더브라까지 택배기사 김 종성 씨의 트럭 안은 ‘작은 마트’ 같았다. 용인=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캠핑장비부터 쌀, 생수 그리고 가슴을 크게 보이게 해주는 원더브라까지 택배기사 김 종성 씨의 트럭 안은 ‘작은 마트’ 같았다. 용인=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힘들고 돈도 안 되고 무시당하는 직업. 젊은 기사들은 택배업을 점점 떠나고 있다. 택배기사의 연령대는 점점 높아지고 있다. 김 씨의 고용주인 유 씨는 “도시형 직업 가운데 인력난이 가장 심한 곳이 택배업계”라고 호소했다. 최근에는 ‘아줌마’들과 부부가 택배업에 뛰어드는 경우가 늘었다. 단, 외국인 노동자는 현행법상 택배기사가 될 수 없다.

인력난을 겪다 보니 택배기사는 마음 놓고 아프지도 못한다. 결근할 경우 택배기사는 자신의 일당보다 2배로 비싼 ‘용차(대신 일해주는 사람)’를 써야 한다. 실제로 한 아파트 단지에서는 부친상을 당한 택배기사가 며칠간 배달을 하지 못해 그 일대 배달체계가 마비됐다는 얘기가 들렸다.

오후 6시, 배송장이 10장 남짓 남았다. 끝이 보이는 듯했다. 전화가 왔다. 한 고객의 환불 요청 전화였다. “30분 전 받은 모피코트가 TV에서 보던 것과 영 다르다”고 했다. 이런 문의는 홈쇼핑 콜센터로 하는 게 원칙인데 사람들은 종종 택배기사에게 전화를 건다. “물건이 왜 이 모양이냐”고 전화해 따지는 고객에게 김 씨는 “죄송하다”고만 했다. 깐깐한 고객의 요구에 김 씨는 동선을 잠시 이탈해 모피를 가지러 발길을 되돌렸다.

702호. 마지막에서 세 번째 집이다. 이 집에 갈 때면 김 씨의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단골고객이기 때문. 그가 물건을 건네자 한 50대 여성이 사탕과 검은콩 우유를 김 씨에게 줬다. 거의 매일 홈쇼핑으로 물건을 주문하는 이 여성은 한결같이 김 씨의 간식을 챙겨주는 고마운 고객이다.

냉담한 고객이 더 많지만 문을 열고 택배기사를 기다리는 따뜻한 고객도 여전히 있다. 아이들이 자신을 가장 반기는 어린이날과 크리스마스는 그도 보너스를 탄 듯 가장 기쁜 날이다. 김 씨는 “혼자 사는 노인들에게는 택배기사가 유일한 방문자가 될 때가 많다”며 “하지만 시간에 쫓겨 대화조차 나눌 수 없는 게 아쉽다”고 말했다.

힘들고 마음 아픈 일투성이지만 김 씨는 택배기사를 그만두지 않을 생각이다. 702호처럼 택배기사를 고맙게 생각하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는 한. 성탄전야, 택배기사를 손꼽아 기다리는 아이가 단 한 명이라도 있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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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염희진 기자 salthj@donga.com
#Narrative Report#택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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