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엘 킴벡의 TRANS WORLD TREND]<7>뉴욕의 아웃소싱 디자이너들, 잇백 로또를 만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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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6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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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알렉산더 왕의 ‘커스틴백’, 마크 제이컵스의 ‘스탬백’, 셰이나 루터가 디자인한 ‘그라이슨’의 핸드백, 프로엔자 스콜러의 ‘PS시리즈백’, 지방시의 ‘나이팅게일백’.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알렉산더 왕의 ‘커스틴백’, 마크 제이컵스의 ‘스탬백’, 셰이나 루터가 디자인한 ‘그라이슨’의 핸드백, 프로엔자 스콜러의 ‘PS시리즈백’, 지방시의 ‘나이팅게일백’.

뉴욕은 미국의 수도가 아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뉴욕이라는 이름 뒤에는 ‘○○의 수도’라는 별칭이 자주 붙는다. ‘세계 경제의 수도’ ‘문화와 예술의 수도’ ‘뮤지컬의 수도’ 등이 그 예다. 최근 들어 뉴욕에 또 하나 별칭이 생겼다. 바로 뉴욕의 유력 일간지 뉴욕포스트가 명명한 ‘프리랜서의 수도’다. 뉴욕에는 자유롭게 시간을 영위하면서 전문성을 활용하는 프리랜서 인구가 다른 도시보다 많은 편이다.

패션업계가 프리랜서의 활동이 돋보이는 대표적인 업종이다. 특히 최근 들어 패션 관련 분야에서 활동하는 프리랜서들 중 아웃소싱 디자이너들의 활약이 대단하다. 그들 대부분은 백(bag)이나 구두만을 디자인하거나, 니트웨어만을 다루거나 혹은 프린트를 개발하는 등 자신의 전문 분야 디자인에만 전념해 브랜드와 거래한다.

다양한 분야 중에서 특히 이들의 활약이 눈에 띄는 곳이 ‘백 디자인’이다. 근래 뉴욕 패션계에서는 ‘브랜드를 성공시키려면 베스트셀러 백을 만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백은 브랜드의 성패를 좌지우지하는 핵심 아이템으로 자리 잡았다. 이 공식대로 뉴욕 컬렉션을 대표하는 디자이너들은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자신의 이름을 건 백 라인에 열정을 쏟고 있다.

의상과 달리 백은 사이즈와 관련된 한계가 없어 대중의 접근성이 용이하다. 또 고급 소재를 사용하기에 수익성이 높고 브랜드의 아이덴티티를 확연하게 보여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소위 ‘잇(it)백’이라 불리는 히트 상품으로 등극하게 되면 인지도와 수익성이 동시에 높아진다.

라이선스의 남발로 브랜드의 가치를 잃었던 프랑스 브랜드 ‘발렌시아가’를 다시 살린 것도, 디자이너 알렉산더 매퀸이 그만둔 이후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던 ‘지방시’를 다시 ‘핫’한 브랜드로 등극시킨 것도 ‘잇백’의 탄생 덕분이다. 또 다음 시즌 패션쇼를 위한 자금 마련을 고민하던 신인 디자이너 듀오 ‘프로엔자 스쿨러’도, 뉴욕패션위크에 혜성처럼 나타난 신참내기에 불과하던 알렉산더 왕도, 모두 패션 신봉자들을 열광시키는 ‘잇백’을 양산했기에 오늘날의 명성이 가능했다. 그렇기에 지금도 뉴욕의 많은 디자이너들이 제2, 제3의 ‘백 로또’의 수혜자가 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하고 있다.

이 ‘잇백’들을 브랜드 네임 뒤에서 창조해 내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웃소싱 디자이너들이다. 발렌시아가 ‘모터백’, 지방시 ‘나이팅게일백’과 ‘판도라백’, 마크 제이컵스의 ‘스탬백’, 프로엔자 스쿨러의 ‘PS시리즈백’, 그리고 알렉산더 왕의 ‘로코백’과 ‘커스틴백’ 모두 베일에 가려진 아웃소싱 디자이너가 디자인했다. 물론 제품 개발과 최종 디자인 확정 등의 절차에는 브랜드 관계자들이 참여하지만 첫 콘셉트는 아웃소싱 디자이너들이 잡았다.

현재 영국 브랜드 ‘멀버리’와 미국 브랜드 ‘그라이슨’, ‘보키어’ 등의 백을 디자인하는 아웃소싱 디자이너 셰이나 루터 씨는 특정 회사에서 정해진 콘셉트에 맞춰서만 일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프리랜서의 매력이라고 말했다. 그는 “특정 디자인이 히트를 치면 인센티브 계약을 통해 일종의 ‘러닝 개런티’를 받을 수 있어 엄청난 부가 수익을 올릴 수 있다”고 말한다. 물론 약간의 ‘서운함’은 감수해야 한다. 자신의 노고가 브랜드명 뒤에 감춰져야만 하기 때문이다. 아웃소싱 디자이너들은 계약에 따라 절대 자신이 디자인한 제품임을 공개할 수 없다.

히트 백을 속속 디자인해 내는 아웃소싱 디자이너들은 하루가 다르게 몸값이 높아진다.

최근 뉴욕 패션계에서는 론칭 때부터 최근까지 알렉산더 왕의 히트백을 모두 디자인한 한 중국계 아웃소싱 디자이너를 라이벌 브랜드인 ‘필립 림’이 낚아채 갔다는 사실이 화제가 됐다. 같은 동양계 디자이너라 친해 보였던 두 디자이너가 ‘히트백 양산기’ 앞에서는 ‘전쟁’을 벌인 셈이기 때문이다.

업계의 반응은 엇갈렸다. “이렇다 할 ‘대박 히트 백’을 내놓지 못해 절치부심하던 필립 림의 과감한 한 수”라는 평가와 반대로 “그래도 상도덕에 어긋나는 것 아닌가” 하는 비난. 이런 뒷얘기를 알 터 없는 대중은 그저 최근 필립 림의 새로운 백 라인에 열광하기 시작했다(필자 역시 처음으로 필립 림의 백에 관심을 갖고 최근 백 하나를 직접 구입하기도 했다).

텍스타일 프린트 디자인을 하는 아웃소싱 디자이너, 레이철 보즈워스 씨의 작품 일러스트. 조엘 킴벡 씨 제공
텍스타일 프린트 디자인을 하는 아웃소싱 디자이너, 레이철 보즈워스 씨의 작품 일러스트. 조엘 킴벡 씨 제공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가 최악의 불경기에 시달리고 있다는 말을 심심치 않게 듣는다. 요즘 들어 조금씩 풀리고 있다고는 하나 아직은 경기 해빙이 피부에 와 닿지 않는다. 그렇기에 패션 업계도 비정규직인 프리랜서 고용에 더욱 관심을 갖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전문성을 띠는 아웃소싱 디자이너는 아무래도 효용가치가 남다르기에 더욱 각광을 받는 것이다.

비록 자신이 디자인한 백이 자신의 이름으로 세상 빛을 보지는 못해도 자유로운 ‘신분’으로 세상을 매료시키는 이들의 빛나는 재능은 패션을 더욱 흥미롭게 만들고 있다.

텍스타일 프린트 디자인을 하는 아웃소싱 디자이너, 레이철 보즈워스 씨는 이렇게 말했다. “제가 아웃소싱 디자이너라는 것이 가장 행복할 때는 가끔씩 거리에서 마주친 어느 여성의 스커트에서, 혹은 코트에서, 또는 스카프 위에서 제가 디자인한 프린트를 만나게 될 때예요. 물론 그녀들은 그것들이 유명 디자이너 작품이라 생각하고 구매했겠지만….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비밀’을 간직한 채 혼자 뿌듯함을 느끼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

패션 광고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재미 칼럼니스트 joelkimbec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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