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성호의 옛집 읽기]<39>제사 위한 건물 ‘서지재사’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3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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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 제공
문화재청 제공
재사(齋舍)란 조상의 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은 건물을 말한다. 당연히 무덤 가까이에 있고, 살림집과 달리 사용하는 횟수가 정해져 있다. 이곳은 죽은 자들을 위한 산 자들의 행위가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조선사회의 중추는 사대부들이었다. 고려시대의 귀족과 달리 이들은 과거를 통해 벼슬을 얻었고, 벼슬에서 물러날 땐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읊으며 자신의 세거지(世居地)로 돌아왔다. 사대부들은 직업 관료가 아니었다. 급료는 사실상 미미한 것이었고, 그들의 기반은 향촌사회라는 지역적 경제기반 위에 있었다. 조선사회는 정치적으로는 중앙집권제였지만 경제는 지역의 토착 성씨들이 나누고 있었다. 그 결과 가문은 모든 가치에 대해 우위에 있었다. 심지어 과거에 급제해 관료가 되는 것조차 지역사회에서 가문의 존재를 높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기도 했다.

제사는 이런 가문의 결속을 위해 문중의 구성원이 모일 수 있는 중요한 계기였다. 율곡 이이는 조선사회가 안정돼 가던 조선 중기를 이미 쇠락기로 진단했다. 조선은 이미 다양성을 잃고 제도적으로 굳어져 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재사건축이 나타난 것도 그 시기다. 피란 가는 임금의 가마에 돌을 던질 정도로 임진란 이후 급격히 무너져 가는 조선사회를 붙들고 매달린 것은 예학(禮學)이었다.

사대부들도 임란 이후의 급격한 사회 변동을 씨족공동체 내에서 다잡기 위해 경쟁적으로 재사를 지었다. 기호학파에서는 사계 김장생이, 영남학파에서는 학봉 김성일(鶴峯 金誠一·1538∼1593)의 제자인 우복 정경세가 조선 후기의 예학 이론을 정립해 가던 시기였다.

경북 안동의 서지재사(西枝齋舍)는 1700년 즈음 학봉 김성일의 묘제를 지내기 위한 재실로 건축되었다. 가문과 학파가 일치했던 당시의 씨족들은 학봉의 예학을 바탕으로 안동지역 살림집의 특징인 ‘뜰집’의 형식을 재사건축의 형식으로 옮겼다. 안동 지역의 집들은 산지가 많은 언덕에 자리 잡고 있어 대부분 안채가 사랑채보다 높을 수밖에 없다.

서지재사는 거의 평지인데도 이 원칙을 고수하기 위해 대청의 기단이 엄청나게 높아졌다. 형식을 지키려는 안간힘과 절제의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성리학적 이념이 충돌하고 있다. 한 건축의 전형에서 한 시대가 저무는 모습이라니.

함성호 시인·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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