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성호의 옛집 읽기]<38>‘안동의 2층집’ 의성 김씨 종택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3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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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 제공
문화재청 제공
조선의 2층집은 누각이나 서원을 제외하고 경북 안동에 있는 재실(齋室)만 따져도 100채가 넘는다. 재실 중에는 2층에 온돌을 안 한 집도 있지만 우복 종택처럼 2층에 온돌을 들인 집도 많다.

의성 김씨 종택은 조선의 사대부 사회가 자리를 잡아가는 초기의 모습부터 조선사회의 몰락과 오늘까지를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사대부가의 족보가 본격적으로 만들어진 때가 임진왜란 이후부터고, 제사를 지내기 위한 재실이 지어지기 전이니 의성 김씨 종택이 지어질 당시에는 살림집에서 제사의 기능이 같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의성 김씨 종택의 대청이나 사랑채, 2층의 누마루는 제사를 위한 공간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집의 평면이 다른 살림집과 달리 복잡하고 의외의 모습이 많은 것도 이러한 까닭이다. 제사를 지낼 때는 많게는 100명 정도의 사람이 모인다. 제사 음식을 마련하는 것은 물론이고 제사를 실질적으로 관리하는 유사들의 모임을 위한 공간도 필요할뿐더러 제사가 끝난 후의 음복례, 제사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잘 방도 여럿 필요하다.

이 모든 기능이 살림집과 어우러진 집이 의성 김씨 종택이다. 이 집은 1587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학봉 김성일이 직접 감독해 다시 지었다. 원래의 모습에서 대청을 조금 손봤을 뿐이라는 학봉의 진술은 사실일지 모르나 그 후 이 집은 꽤 많은 변화를 겪은 것 같다.

무라야마 지준(村山智順)의 ‘조선의 풍수’에 실린 1930년대 의성 김씨 종택의 모습은 지금과 다르다. 지금 출입문이 있는 자리는 담장을 둘렀고, 외부에서 종택으로 출입하는 길 또한 지금과 같이 대문과 마주보며 남쪽으로 나지 않고 행랑채와 나란히 동서 방향으로 나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대문채가 따로 있었다는 것인데, 대문채로 추정되는 가장 유력한 자리는 지금 1층은 헛간, 2층은 서고로 쓰는 서쪽 날개채다.

시간이 지나면서 재실의 기능이 약화되고 다시 종가가 제사의 기능을 전담하면서 대문채가 제사에 참석하러 온 사람들을 위한 숙소나 음복례의 공간으로 변용되었을 것이다. 이 종택은 임란 이전에 지어졌다. 안동에 제사만을 위한 재실이 본격적으로 지어지기 시작한 것은 임란 이후부터다. 그리고 근대 이후 제사는 그 사회적 역할을 많이 잃었다. 의성 김씨 종택의 2층 날개채는 변화하는 우리 사회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함성호 시인·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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