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 나의 길/송월주 회고록]<24>성철스님3  성철스님 불 지핀 ‘돈점’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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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2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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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토끼의 뿔과 거북의 털을 구하러 다녔소

성철 스님이 참선 중인 스님들을 지도하고 있다. 1981년 성철 스님이 저서 ‘선문정로’를 통해 돈오점수론을 정면으로 비판하면서 시작된 이른바 ‘돈점논쟁’은 불교계 최대 논쟁의 하나다. 백련불교문화재단 제공
성철 스님이 참선 중인 스님들을 지도하고 있다. 1981년 성철 스님이 저서 ‘선문정로’를 통해 돈오점수론을 정면으로 비판하면서 시작된 이른바 ‘돈점논쟁’은 불교계 최대 논쟁의 하나다. 백련불교문화재단 제공
1981년 당시 종정인 성철 스님이 저서 ‘선문정로(禪門正路)’에서 깨달음과 관련해 돈오점수(頓悟漸修·깨친 후에도 계속 닦아야 한다)를 정면으로 비판하며 돈오돈수(頓悟頓修·깨달은 뒤에는 더 이상 닦을 필요가 없다)를 주장하자 불교계가 벌컥 뒤집혔다. 깨달음과 닦음(수행)은 선불교의 핵심 문제로 이전에는 보조국사 지눌 스님(1158∼1210)의 돈오점수를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른바 ‘돈점논쟁’은 성철 스님이 속한 해인사와 지눌 스님이 말년을 보낸 송광사의 대립으로 번졌고 불교계를 넘어 학자들까지 가세했다.

말을 조금 보태면 성철 스님은 돈오의 기준으로 동정일여(動靜一如), 몽중일여(夢中一如), 오매일여(寤寐一如)를 제시했다. 동정일여는 일상생활에서 변함없이 화두참구가 이뤄지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잠들어 꿈을 꾸면 화두는 사라진다. 꿈속에서도 한결같은 것이 몽중일여다. 마지막으로 깊은 잠에 들어도 깨어 있을 때처럼 수행의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 오매일여다. 스님은 오매일여를 통과하지 못하면 돈오가 아니고, ‘깨달은 뒤에도 닦아야 하는 것은 깨달은 것이 아니다’라고 선언했다. 그러면서 스님은 “몹쓸 나무가 뜰 안에 돋아났으니 베어버리지 않을 수 없다”며 해인총림 스님들에게 지눌 스님의 돈오점수 수행법을 경계하도록 했다.

과연 그런가? 돈오돈수에 묻혔지만 다른 목소리들도 적지 않았다. 보조사상연구원 등 송광사 쪽에서는 지금도 여전히 돈오점수의 입장이다. 수덕사 주지와 덕숭총림 방장을 지낸 벽초 스님은 당시 성철 스님 쪽에서 보낸 책 ‘선문정로’를 백련암으로 돌려보냈다.

봉암사 결사에 참여했던 월산 스님은 생전 이런 말을 남겼다.

“아무려면 어떤가. 누가 내게 와서 어떤 게 옳으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런 거 모른다고 할 거야. 다들 부질없는 짓이다.” 실제 월산 스님의 생애를 토대로 고은 시인이 쓴 스님 비문에는 “돈오돈수고 돈오점수고, 둘 다 동해 바다에 빠뜨려라”라고 적혀 있다.

2000년 초반에 만난 숭산 스님은 돈점논쟁이 화제에 오르자 과거 성철 스님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 일부를 소개했다. 숭산 스님은 “오직 수행할 뿐이다. 돈오돈수도 서른 방망이(서른 번 방망이를 맞아야 한다는 뜻), 돈오점수도 서른 방망이라고 썼다”고 말했다.

당대를 대표했던 학승(學僧) 탄허 스님도 불교계가 돈오돈수로 치닫는 분위기에 아쉬움과 염려를 나타냈다.

“성철 스님이 돈오점수를 죽이고, 일방적으로 돈오돈수를 주장하는 바람에 스님들을 까막눈으로 만들고 있다. 내가 불교계 원로인데 종정 스님과 다른 얘기를 하면 큰 싸움이 날 거다. 싸움 벌이는 것 같아서 안 한다. 훗날 눈 밝은 수행자가 나오면 돈오돈수가 문제가 될 거다.”

성철 스님의 돈오돈수는 우선 여기저기서 깨달았다는 검증되지 않은 주장을 내놓지 말고 제대로 수행하라는 경책의 의미가 담겨 있다. 이 논쟁은 불교의 위상을 높이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 한때 종권 다툼과 잿밥 싸움으로 끝없이 추락하던 불교계가 선의 본질을 둘러싼 철학적인 논쟁을 벌인 것이다.

그렇지만 아쉬움이 더 크다. 당시 향곡, 서옹 스님 등이 성철 스님의 돈오돈수를 지지하면서 돈점논쟁이 제대로 발전하지 못한 채 중심이 돈오돈수 쪽으로 쏠렸기 때문이다.

중국 선종(禪宗) 사서의 하나인 ‘전등록’의 육조 혜능(六祖 慧能·638∼713)과 제자 남악 회양(南岳 懷讓·677∼744) 선사의 대화에도 ‘깨달음을 얻은 뒤에 닦음도 있고 증(證)함도 있다’고 언급한 대목이 나온다.

깨달음을 위해서는 ‘살불살조(殺佛殺祖)’도 마다하지 않는 것이 선불교의 전통이라지만 심도 깊은 논쟁 없이 지눌 스님까지 쉽게 ‘죽이는’ 것은 맞지 않다. 더구나 종단은 지눌 스님을 조계종의 종지를 밝히고 널리 알린 중천조(重闡祖)로 삼고 있다.

내가 보기에 돈점논쟁은 하나를 택하고 다른 하나는 버려야 하는 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수행은 수행자의 근기(根氣)에 맞춰 행해야 한다. 간화선을 중심으로 한 수행이 맞지만, 절대선으로 여겨 다양한 수행법을 무조건 배척해서는 안 된다. 실제 돈오의 경지를 오매일여까지 높였을 때 정말 이 관문을 뚫은 이가 있을지 의문이다.

‘선문정로’ 발표 이후 20년이 흘렀다. 이제야말로 과거의 돈점논쟁을 냉정하게 짚어보고 다시 논의할 때다.

정리=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25>회에서 송월주 스님은 세계일화(世界一花)의 신념으로 국제 포교의 선구자가 됐던 숭산 스님을 회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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