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 나의 길/송월주 회고록]<20>청담스님2… “중 밥상 삼찬이면 족한 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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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1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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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토끼의 뿔과 거북의 털을 구하러 다녔소

청담 스님(왼쪽)이 1971년 11월 이화여대에서 열린 강연에 앞서 다른 참석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스님은 평소 “살아있는 중생을 위해서는 때와 시간, 장소를 가리지 않고 불법을 펴야 한다”고 말했다. 도선사 제공
청담 스님(왼쪽)이 1971년 11월 이화여대에서 열린 강연에 앞서 다른 참석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스님은 평소 “살아있는 중생을 위해서는 때와 시간, 장소를 가리지 않고 불법을 펴야 한다”고 말했다. 도선사 제공
“스님, 공양상이 허술해서 우짭니까.”

“그래도 오늘은 간장 한 가지가 더 올라왔구먼. 중 밥상 삼찬이면 족한 기다.”

종단 총무원장이던 청담 스님과 속가 딸로 동국대 불교학과에 다니던 묘엄 스님의 대화다. 청담 스님의 밥상에 오른 것은 밥과 시래깃국, 김치, 간장 종지가 전부였다. 이 사연을 전해 들었을 때 고개를 끄덕거리며 애틋한 느낌에 잠겼다. 어찌 여염집 부녀와 같을 수 있으랴. 그럼에도 묘엄 스님의 그 마음이 전해졌다. 그랬다. 청담 스님은 불교정화운동의 대의뿐 아니라 흐르는 시냇물도 아낄 정도로 검소함이 몸에 배어 있었다.

현재의 대한불교 조계종이 1962년 출범한 뒤 7년 만에 종단은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 청담 스님이 1969년 8월 종단 탈퇴를 선언한 것이다. 초유의 일이었다. 정화운동의 상징이자 종정을 지낸 어른이니 종단 안팎이 벌컥 뒤집어졌다.

스님의 탈퇴 선언에는 종단 내부의 복잡한 흐름이 배경으로 깔려 있었다. 스님은 초대 종정 효봉 스님에 이어 1966년 제2대 종정으로 취임했다. 1967년에는 3000여 명이 참석한 전국불교도대표자대회를 주도해 경전 번역과 도제 육성의 현대화, 포교, 군승제 촉구, 신도 조직화, 부처님오신날 공휴일 제정, 불교회관 건립, 승가대 설립, 불교방송국 설립 등 9개항을 결의했다. 이 결의는 불교 정화의 이념을 계승해 불교 발전을 위한 기본 틀을 제시한 것이다.

그러나 이후 종단의 변화는 지지부진했고 급기야 1968년 12월 불국사 공금 유용을 둘러싸고 스님들 사이에 폭력 사태가 발생해 사회 문제로 비화됐다.

내가 지켜본 바에 따르면 스님은 이런 상황을 걸음마를 걷고 있는 종단이 쓰러질 수도 있는 심각한 위기로 받아들였다. 더구나 종단의 국회 격인 종회가 스님의 종단 유신 재건안을 거부하자 종단 탈퇴를 선언한 것이다. 그 파문은 컸다. 진통 끝에 나의 사형인 월산 스님이 총무원장으로 선출된 뒤 청담 스님은 장로원장으로 복귀했다.

상황은 다시 급박하게 흘렀다. 정화운동 이후 통합종단 출범 뒤에도 계속 갈등 관계에 있던 대처승(帶妻僧)들이 1970년 5월 태고종을 등록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내 소신은 종단의 최고 어른인 종정은 상징적 존재이고, 종단의 운영은 총무원장이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의견을 밝히자 청담 스님은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총무원 교무부장으로 있던 나는 스님의 총무원장 복귀를 강력하게 권유하고 도왔다. 청담 스님은 2개월 뒤 열린 종회에서 총무원장으로 선출됐다. 청담 스님의 종단 탈퇴도 그렇지만 종정을 지낸 분이 총무원장을 맡은 것도 초유의 일이었다.

어찌 보면 종단은 아직 청담 스님의 리더십과 힘이 필요했던 시기였다. 전례가 없지만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종정과 총무원장의 역할이 명확하지 않아 혼란도 적지 않았다.

청담 스님은 대의가 있다면 자리에 연연하거나 주변의 눈치를 보지 않았다. 1967년 스님이 종정으로 있을 때의 일이다. 당시 총무원과 동국대가 모 회사 운영에 관여하다 어음부도로 몇천만 원의 손실을 보게 됐다. 총무원장 경산 스님은 거센 사퇴 압력에도 불구하고 일단 수습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나 종정이던 청담 스님이 먼저 사퇴하는 바람에 결국 종정과 총무원장이 함께 물러나는 것으로 일단락됐다.

종단 안팎에 복잡다단한 사안이 많았다. 그럼에도 총무원장이던 청담 스님이 조계사에 머무르면서 대중공양 때마다 참회한다는 의미의 자자법회(自恣法會)를 자주 거행한 것은 수행자의 자세를 흩뜨리지 말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때 스님은 “자자에 의해 마음의 편안을 되찾게 되고, 마음의 편안을 되찾으려면 잘못을 참회하고, 참회하려면 허물을 고백하고, 고백함으로써 마음이 청정해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스님은 당시 최고 권력자인 박정희 대통령의 부인 육영수 여사를, 표현은 안 했지만 딸처럼 허물없이 대했다. 어느 날 육 여사가 서울 도선사를 찾아 인사를 청했다. 그러자 스님은 누구든 절에 왔으면 먼저 부처님께 절부터 올려야 한다며 법당으로 안내했다. 스님은 이 만남을 계기로 청와대에서 열리는 모임에 이따금 참석하면서 여러 문제에 대해 박 대통령을 설득한 것으로 들었다. 박 대통령은 비구와 대처승의 갈등이 격화되면서 불교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었다. 스님은 육 여사에게 대덕화(大德花)라는 법명을 지어주면서 항상 공덕을 쌓으라고 이렇게 강조했다.

“남을 위해 살면 보살이요, 자기를 위해 살면 중생인 게야.”

정리=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21>회에서 송월주 스님은 청담 스님의 입적 당시를 회고합니다. 청담 스님은 입적 전 법문을 통해 “육신은 유한하지만, 법신은 영원하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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