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있게한 그 사람]박명성 신시컴퍼니 프로듀서·명지대 교수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11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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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연출 소질없던 내게 “극단 살림 맡아보라”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박명성 신시컴퍼니 프로듀서·명지대 교수
박명성 신시컴퍼니 프로듀서·명지대 교수
전봇대에 붙어 있는 조그만 광고를 보자마자 무작정 찾아갔다. ‘극단 동인극장 연구생 구함’이라고 적힌 종이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배우가 되겠다고 상경한 나는 그렇게 연극판에 뛰어들었다.

거기서 배우 김갑수 형을 만났다. 극장에서 기숙하면서 배우들의 양말을 빨아주고 라면을 끓여주는 게 연구생의 일이었다. 심부름 잘하고 시키는 것 성실하게 하는 나를 갑수 형은 좋아했다. “명성아, 잘 못하는 노래가 있으면 1000번 연습하면 된다. 잘 안 되는 대사가 있으면 1000번을 연습하면 된다.” 매일 연기 연습을 거르지 않는 갑수 형을 보면서 나도 어깨너머로 연기 훈련을 할 수 있었다. 성실하고 끈기 있게 살아야 한다는, 인생에 대한 태도도 배우게 됐다. 극장에서 함께 먹고 자던 형은 가끔 집에 들러 책을 한 보따리 갖고 왔다. 소설이며 철학책을 밤늦도록 읽는 형을 보면서 “대단한 배우가 되겠구나”라고 확신했다. 배우로서의 재능이 없음을 일찌감치 깨달았지만 어떻게든 연극판에 있고 싶어 했던 나, 그런 나를 일생의 큰 멘토인 김상열 선생께 데려간 사람이 갑수 형이다.

연출가이자 마당세실극장 대표였던 김상열 선생은 연극계의 거물이었다. 배우의 꿈을 접은 내게 선생은 조연출로 일할 기회를 주셨다. 수년을 작업했지만 1989년 단원 워크숍 작품으로 ‘동물농장’을 연출하고는 연출가의 꿈도 포기해야 했다. 최선을 다했는데도 결과가 엉망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연극판 사람들이 너무 좋았고 거기에서 어떤 역할이라도 하고 싶었다. 선생은 내게 극단 살림을 담당하는 기획자의 일을 맡기셨다.

말하자면 곳간 열쇠를 주신 셈이다. 선생이 그만큼 나를 신뢰했고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자주 야단을 맞았다. 선생은 ‘기획해서 화를 내는’ 분이었다. 하루 날을 잡아선 술자리에서 세 시간이고 네 시간이고 모임이 파할 때까지 혼을 내셨다. 때로 서운하기도 했지만 그 호통은 내가 장차 공연 회사를 경영하는 데 도움이 됐으면 됐지 해가 된 게 아니었다.

신시컴퍼니가 제작한 뮤지컬 ‘맘마미아!’가 다음 달 10일 1000회 공연을 맞는다. 그간 ‘맘마미아!’를 비롯해 ‘렌트’ ‘아이다’ ‘시카고’ 등 많은 뮤지컬을 제작했다. 내 첫 뮤지컬 작품이 떠오른다. 브로드웨이 현지 뮤지컬을 정식으로 들여오고 싶다고 김상열 선생께 말씀드리자 선생은 나를 뉴욕으로 보냈다. 그때 선택한 작품이 1980년대 뉴욕의 소외된 사창가를 배경으로 한 ‘더 라이프’였다. ‘더 라이프’를 국내 무대에 올린 1998년은 외환위기 시절이었다. 대형 뮤지컬 제작은 엄두도 못 내던 때였지만 나는 잘되리란 확신이 들었다. ‘미친 놈’이라는 주변의 손가락질을 받아가면서 라이선스 계약을 하고 제작에 들어갔다. ‘더 라이프’ 이후 국내에서 정식 라이선스 계약이 자리 잡으면서 뮤지컬이 크게 성장하는 계기가 됐다. 제작자로서 큰 기여를 했다고 자부한다.

‘더 라이프’ 공연 준비 막바지에 이를 즈음 대관료 5000만 원을 구할 수가 없었다. 극단 예산을 융통해 볼까 하고 선생께 말씀드렸더니 단호하게 “다른 데 가서 알아보라”고 하셨다. 한 회사에 지분을 넘기고 투자를 받았지만 선생에 대한 섭섭한 마음은 계속 남아 있었다.

막이 올랐을 때는 대한민국 전역이 집중호우로 큰 피해를 입은 때와 겹쳤다. 그런데 빗속을 뚫고 온 관객들로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2200석이 꽉꽉 찼다. 공연이 끝난 뒤 선생이 말씀하셨다. “돈거래 안 하는 게 내 철칙이다. 너한테도 그걸 가르쳐 주고 싶었다.” 얼마 후 췌장암 진단을 받은 선생이 작고하셨을 때 나는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정우 스님에 대한 감사를 덧붙이고 싶다. 1984년 뮤지컬 ‘님의 침묵’ 첫 공연을 보러 오신 스님은 이후 연극인들에 대한 물질적 정신적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다. 1987년 현재의 신시컴퍼니의 전신인 극단 신시가 만들어졌을 때 설립을 제안하고 후원해 주신 분이 정우 스님이다. 이렇게 감사한 사람들. 내 삶은 참으로 많은 분들께 빚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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