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있게한 그 사람]소설가 복거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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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7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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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에 비친 내 얼굴에 문득 아버지 모습이… “그립습니다, 고맙습니다”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유전적 자산은 한 사람의 모습과 운명을 가장 근본적 수준에서 결정한다. 당연히 누구에게나 부모가 가장 중요한 사람들이다. 부모는 가장 중요한 환경이기도 하다.

사람은 정말로 중요한 것들은 배우는 줄도 모른 채 배운다. 삶은 깔끔할 수 없고 굴곡이 심하다는 것을 나는 아버지의 삶에서 모르는 새 배웠다. 그런 배움은 나로 하여금 절충주의적 태도로 세상을 보게 만들었고 삶의 미묘한 결들을 다루는 문학에 쏠리도록 했다.

1940년대 초엽 아버지는 충남 북동지역에 있던 민족주의 조직에 참여했다. 광복 뒤 이 조직은 남로당에 흡수되었고, 북한군이 우리 고향을 점령했을 때 아버지는 선전요원으로 징집되었다. 자신의 영향력을 사람들을 살리는 데 썼던 덕분에 결국 무사했지만, 아버지는 고향을 떠나 미군부대에서 일자리를 찾아야 했다.

1960년대 초엽 아버지는 여당에 참여했다. 기지촌으로 흘러온 사람들은 모두 뿌리 뽑힌 사람들이었고, 당연히 체제에 대해 불만이 컸다. 아버지는 그런 사람들을 설득해서 여당 후보가 늘 압도적 지지를 받도록 만들었다.

그런 성과는 정치적 힘이 되었다. 아버지는 깡패들이 횡행하던 마을에 파출소가 들어오도록 했고, 산중 마을에 전기가 들어오도록 했다. 기지촌을 실질적으로 먹여 살리는 사람들은 ‘양색시’들임을 강조하면서, 그들이 사람대접을 받도록 했다. 먼 도시의 보건소까지 나가 검진을 받는 대신 보건소 직원들이 출장 나오도록 주선하자 양색시들은 특히 고마워했다.

이런 일들 가운데 가장 멋진 작품은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분교를 세운 것이었다. 아버지는 지주를 설득해서 용지를 헐값에 구하고 교육청의 허가를 따내고 미군 지휘관의 협조를 받았다. 미군 장비들이 터를 닦고 미군 자재들로 건물이 섰다. 나를 감동시킨 것은 그 학교에 다닐 자식을 가질 가능성도 없는 양색시들이 대야를 머리에 이고서 돌과 모래를 나른 일이었다. 준공식은 미군들과 기지촌 주민들이 하나가 된 축제였다. 미군부대 지휘관이 고사 지내는 상에 오른 돼지머리에 큰절을 올리자 사람들의 환호성이 골짜기를 채웠다.

지난달 나는 악극단을 이끌고 의정부에서 미 제2사단 장병들을 위한 공연을 했다. 미 해병 1사단의 ‘장진호 전투’를 다룬 영어 뮤지컬 ‘다른 방향으로의 공격(Attacking in Another Direction)’이 끝난 뒤 2사단장 터커 소장이 무대에 올라와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우리 배우들에게 일일이 사단 마크가 새겨진 코인을 주었다. 미 2사단의 상징 ‘인디언헤드’ 조상을 받으면서 나는 문득 반세기 전 우리 마을에 분교가 선 날을 떠올렸다. 어릴 적 미군들의 도움을 받은 기지촌의 아들이 나름으로 고마움을 표시한 것이었다.

사람들의 삶을 낫게 만드는 작은 일들을 하는 아버지를 보고 자라면서, 나도 세상을 크게 바꾸려 나서기보다 사람들의 삶을 작게나마 실제로 낫게 만드는 데 마음이 끌렸다. 내가 좌파 전통이 유난히 짙은 대학에 다니면서 사회주의 이념에 빠지지 않았던 데엔 그런 태도도 작용했다. 회사에 다닐 때는, 회사를 더 낫게 만든다고 설쳐서 동료들과 상사들을 피곤하게 만들었다. 물론 내 시도들은 대부분 실패했다. 그래도 그런 경험은 뒤에 논객으로서 경제적 자유주의에 바탕을 둔 정책들을 내놓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아버지의 영웅은 당연히 박정희 대통령과 김종필 총리였다. 김종필 총리가 권력을 물려받는 것처럼 보였을 때, 내가 그 얘기를 꺼내자, 아버지는 고개를 저었다. “김종필이는 대통령 못 된다. 경상도 사람들이 넘겨줄 것 같으냐? 김영삼이를 내세울 거다. 두고 봐라.”

어쩌다 그 예언이 생각나면 궁금해진다. 아직 지역구도가 고착되지 않았던 시절 기지촌의 허름한 정치인이 어떻게 그런 판단을 할 수 있었는지. 부모는 자식을 잘 알지만, 부모를 제대로 아는 자식은 드물다. 거울에 비친 내 얼굴에서 언뜻언뜻 아버지의 모습을 보는 일이 잦아진 요즈음, 그를 잘 알지 못했고 실은 알려고 애쓴 적도 없다는 생각은 가슴에 시린 회한을 남긴다.

※ 이 코너에 기고하고 싶은 분은 원고지 10매 분량 원고를 reporter@donga.com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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