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덕노의 음식이야기]<36>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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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5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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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덩어리 수박’ 너무 비싸 아무나 못먹었다


“수박 한 통 값이 쌀 다섯 말.”

요즘 시세가 아니라 세종 23년(1441년) 때의 가격이다. 엄청나게 비싼 것 같은데 당시 물가를 알 수 없으니 피부에 와 닿지는 않는다. 해서 속담을 인용해 보면 ‘섬 처녀 시집갈 때까지 쌀 한 말을 못 먹는다’고 했다. 섬 아낙이 평생 먹는 쌀보다 수박 한 통 값이 더 비쌌던 것이다. 그러니 수박이 아니라 금덩어리다. 믿지 못하겠으면 세종실록 23년 11월 15일자 기록을 보면 된다.

지금은 수박이 흔한 과일이지만 조선 초만 해도 수박을 훔쳐 먹다 곤장 맞고 귀양을 가거나 심지어 수박 때문에 목숨을 잃은 정승도 있었다.

금덩어리처럼 비싼 수박이었으니 우리나라 역사에서 위대한 성군으로 꼽히는 세종대왕마저도 수박도둑만큼은 참기가 힘드셨던 모양이다. 세종 5년, 주방에서 일하던 한문직이라는 내시가 수박을 훔쳐 먹다 들켰다. 곤장 100대를 맞고 귀양을 갔으니 죽도록 맞은 셈이다. 세종 12년에도 궁중에 물품을 공급하는 내섬시 관리가 수박을 훔쳐 먹었다가 곤장 80대를 맞았다.

수박을 빌미로 부관참시를 당한 사람도 있다. 사헌부 관헌 김천령이다. 연산군은 “내가 일찍이 중국의 수박을 보고 싶어 했는데 (김)천령이 강력하게 주장해 막았다. 임금이 다른 나라의 진귀한 물건을 구하겠다는데 신하가 어찌 감히 그르다고 말하는가. 천령을 효수하여 전시하고 그 자식을 종으로 삼으라”고 명령한다. 이미 죽은 김천령을 또 죽이라고 한 것이니 무덤을 파내어 죽은 사람의 목을 베는 부관참시의 형을 받은 것이다.

연산군일기 10년의 기록인데 김천령을 부관참시한 까닭은 폐모 윤씨의 복위와 얽힌 갑자사화와 관련이 있지만 명분은 수박을 꼬투리로 삼았을 만큼 수박은 소중한 과일이었다.

조선 후기에도 수박이 흔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정조 때 정약용이 수박 재배 농민의 어려움이 담긴 시를 남겼다. “호박 심어 토실토실 떡잎 나더니/밤새 덩굴 뻗어 사립문에 얽혔다/평생 수박을 심지 않는 까닭은/아전 놈들 트집 잡고 시비 걸까 무서워서라네.” 수박 수탈이 그만큼 심했다는 이야기다.

흔한 수박을 왜 이렇게 보물처럼 여겼을까. 수박은 참외와 함께 우리나라 토종 과일일 것 같지만 사실은 외국에서 온 과일이기 때문이다.

허균은 도문대작(屠門大嚼)에서 고려 때 홍다구(1244∼1291)가 처음 황해도 개성에 수박을 심었다고 적었다. 홍다구는 충렬왕 때의 사람으로 부친은 몽골이 고려를 침략할 때 길 안내를 한 사람이고 본인도 고려 주둔 몽골군 장군으로 삼별초의 난을 진압했던 사람이다.

수박은 원산지가 남부 아프리카로 서역을 거쳐 비슷한 시기에 고려와 중국 송나라에 전해졌지만 원래 사막에서 자라던 작물이다. 이 때문에 고려 후기인 13세기 말에 수박이 한반도에 전해졌지만 약 150년이 흐른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종자개량이 이뤄지지 않아 널리 재배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허균이 충주와 원주 수박이 맛있다고 한 것을 보면 조선 중반 이후 재배가 확대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930년대 신문 기사에서 참외는 평민의 과일이고 수박은 양반의 과일이라고 한 것을 보면 근대에도 수확량이 그렇게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이제 수박이 맛있어지는 계절이 오는데 한때 금덩이만큼 귀한 과일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맛도 조금은 색다르게 느껴지지 않을까.

<음식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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