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찬식 칼럼]중국이 소프트파워까지 갖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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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7월 15일 20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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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세계사 교과서는 1896년 조선 정부가 펴낸 ‘만국약사’다. 이 책에선 세계 각국을 4개 단계로 분류하고 있다. ‘개화(開化)’ ‘반개(半開)’ ‘미개(未開)’ ‘만이(蠻夷·야만인)’가 그것이다. 상공업과 문화가 발달해 ‘개화’된 국가로는 유럽 미국 일본을 꼽고 있고 ‘반개’된 나라 중에는 한국 중국이 들어 있다. 중국을 절반밖에 개화되지 않은 상태로 규정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조선의 지식인에게 중국은 세계 질서의 주축이자 영원한 문화적 스승이었다. 한국은 중국의 속국으로서 정기적으로 조공(朝貢)의 예를 표하는 관계이기도 했다. 중국을 ‘반개’ 상태로 본 것은 우리가 이 당시 벌써 중국 중심의 세계관에서 꽤 벗어나 있었음을 뜻한다.

중국은 1840년 아편전쟁에서 영국에 패하면서 급속히 무너졌다. 한국 일본 등 동아시아의 지식인에게 중국의 패배는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이었다. 동양문명이 서양문명에 무릎을 꿇은 것이었다. 중국 내에서도 중국 전통은 낡고 가치 없는 것으로 무시되기 시작했다. 중국이 서양에 패한 것은 중국 문명이 그만큼 열등했기 때문인 것으로 여겼다. 중국 것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일은 1949년 중국 공산당이 혁명에 성공하면서 더 심해졌다. 공자묘 등 수많은 역사 유산을 봉건시대, 계급시대의 잔재로 몰아 파괴했던 1960, 70년대 문화대혁명은 자기 부정의 절정이었다. 그렇게 중국의 문화와 문명은 160년 이상 긴 잠에 빠져 있었다.

무르익는 ‘세계 문화 중심’의 꿈

2002년 중국 공산당은 제16차 전국대표대회에서 ‘문화 건설’을 처음으로 꺼내들고 나왔다. 군사대국 경제대국 이후의 국가 목표를 문화대국으로 정한 것이다. 무형의 정신적 자산인 문화를 ‘건설’하겠다는 표현이 거북스럽게 느껴지지만 중국 정부는 건설이라는 말 그대로 강하게 밀어붙이고 있다.

총객석 5000석이 넘는 세계 최대의 오페라하우스 ‘국가대극원’이 2007년 베이징에 개관했다. 세계 정상급 공연단체의 각종 무대가 끊이지 않는다. 박물관 설립 붐이 일면서 자고 나면 새로운 박물관들이 문을 열고 있다. 중국의 유구한 역사를 반영하듯 전시 유물들은 양과 질 면에서 외국 관람객들을 압도한다.

중국 정부의 문화 관련 예산은 2005년 74억 위안(약 1조3000억 원)에서 지난해 280억 위안(약 5조 원)으로 4배 가까이 증가했다. 소득수준의 향상으로 문화소비가 뒷받침되면서 영화시장의 경우 올해 한국을 추월해 아시아 2위로 올라선다는 소식이다. 5년 내로 아시아 1위인 일본까지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세계 문화콘텐츠시장의 연간 성장률이 평균 6.6%인 데 비해 중국의 성장률은 14.6%로 문화산업에서 고속 팽창을 거듭하고 있다.

전통문화를 부활시키려는 노력도 주목된다. 중국 지도자들이 유교 이념을 앞장서 강조하고 있고 각급 학교에서는 전통사상에 대한 교육을 강화했다. 2008년부터는 중국의 전통 명절인 청명절 단오절 중추절을 법정공휴일로 지정했다. 한때 폐기 처분했던 중국적 가치를 다시 살려내려는 것이다. 2004년 서울을 시작으로 세계 88개국에 설치한 공자학원에서 중국어를 가르쳐 중국어 가능 외국인을 1억 명으로 늘린다는 계획이다. 중국어를 영어에 필적하는 세계어로 키우려는 계산이 깔려 있다.

중국을 세계 문화의 중심으로 복귀시키려는 이런 시도가 얼마나 성과를 거둘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 중국은 여전히 ‘가짜가 판치는 나라’ ‘이념적으로 경직된 사회주의 국가’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문화의 특성상 정부 주도로 문화를 진흥시키는 계획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중국이 군사 경제대국에 이어 문화 등 소프트파워까지 손에 쥐는 그 언젠가를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중국과 인접한 지리적 관계로 보나, 동양 문화권이라는 동질적 관계로 보나, 13억 명에 이르는 중국의 인구 규모로 보나 ‘문화대국 중국’의 파급력은 엄청날 것이다.

지난주 일본 도쿄국립박물관에서는 찬란했던 중국 문명을 조망하는 ‘탄생! 중국 문명’ 전시회가 개막됐다. 중국의 국보급 문화재를 가져와 중국 문명의 출발과 발전 과정을 보여주려는 대규모 행사다. 중국의 본질을 차근차근 파악하려는 일본 스타일의 ‘기초 다지기’ 노력으로 풀이된다.

중국을 더 깊이 알고 대응해야

우 리의 중국 인식은 주로 비즈니스 상대에 머물러 있다. 우리 학계에는 긴밀하게 살아온 한중 두 나라가 수천 년에 걸쳐 어떤 관계를 맺어왔는지 기초적인 한중관계사 연구조차 잘 되어 있지 않다. 과거의 경험을 새로운 방향 설정의 토대로 삼을 필요가 있다. 지금부터 준비하지 않으면 훗날 중국에 다른 형태의 ‘조공’을 바치며 살아가는 처지가 돼 있을지도 모른다.

홍찬식 수석논설위원 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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