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시각/이병기]‘개천의 용’과 무상급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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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7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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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 후반의 전문경영인 3명과 함께한 저녁 자리였다. 증권사 사장이 “아들 하는 짓이 하도 마음에 안 들어 아버지가 어린 시절 얼마나 어렵게 살았는지 구구절절이 설명했다가 비웃음만 샀다”고 씁쓸해했다. 재벌 계열사의 한 사장이 “재수생 시절 돈이 없어 구내식당에서 여학생이 먹다 남은 밥을 직원들 모르게 가져다 먹은 적이 종종 있다고 자식들에게 말하자 비위생적이라는 말이 돌아왔다”고 맞장구를 쳤다.

갑자기 화제가 자식에서 어린 시절로 옮아갔다. 가난한 어린 시절이라는 공감대를 가진 것을 확인한 참석자들은 모두 거나하게 술에 취해 가슴 아픈 이야기를 털어놨다. 중학교 등록금이 없어 어머니가 결혼반지를 판 일, 대학 학비는 물론 가족 생활비까지 버느라 중간고사를 볼 수 없었던 일, 책값조차 감당할 수 없어 2년간 준비하던 고시를 눈물을 흘리며 포기한 일….

누군가 “이 자리까지 온 것은 부모님의 희생과 가난한 학생도 명문대를 갈 수 있었던 시대 덕분이다”라고 말하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개천의 용은 이제 전설이 되고 있다. 최근 한국개발연구원(KDI) 김희삼 부연구위원은 ‘세대 간 경제적 이동성의 현황과 전망’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사교육 시장의 심화에 따라 잘사는 집 자녀들의 명문대 진학률이 상승했고 경제개발로 자산이 축적되고 상속을 통한 경제력의 대물림이 커지면서 교육을 통한 계층 상승이 어려워질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서울대 사회학과 서이종 교수는 “수업시간에 상속 이야기가 나오자 모두 귀가 쫑긋해 듣고, ‘상속보다는 기부’ 운동에 거부감을 보인 학생들이 많은 것을 보고 학생들의 계층이 변했다는 것을 실감했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이런 현실을 이미 알고 있다. ‘자식이 명문대 가려면 아빠의 무관심, 엄마의 헌신, 할아버지의 경제력이 3대 조건’이라는 우스개는 그 어떤 보고서보다 세태의 본질을 건드리는 힘이 있다.

이런 현실에서 진보 교육감들이 무상급식 전면 확대를 주장하는 것을 보면 과연 이들이 가장 시급한 교육 현안을 무엇으로 생각하는지 의문이 든다. 필자가 보기엔 공교육의 경쟁력 상실과 사교육의 범람으로 ‘교육 기회의 균등’이라는 사회의 방파제가 무너져 가는 것이다.

초중고교 학생 모두에게 무상급식을 하려면 2조8000억 원이 추가로 든다고 한다. 이 돈이면 6만여 명의 교사를 추가로 뽑을 수 있다. 방과 후 학습에 학원 강사를 초빙하거나 시골학교에 원어민 교사를 집중 배치할 수도 있는 돈이다. 개천의 용 만들기는 보수 진영도 반대하기 어렵다. 결과의 평등은 반대하지만 기회의 평등은 찬성하는 것이 보수다.

이런 사실을 알고도 무상급식을 들고 나왔다면 공교육 회복이 성취해내기 대단히 어렵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이 또한 실망스럽다. 진보 진영이 진취성을 잃어버리고 말초적인 방향으로 퇴행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차라리 자치단체장과 교육감을 모두 진보 인사로 선택한 곳에서 두 사람이 한 팀을 이루어 단체장은 예산을 충분히 밀어주고 교육감은 현장을 뛰면서 공교육 강화에 나서는 모습을 보고 싶다. 비록 목표한 성과가 나오지 않더라도 전면 무상급식보다는 효과도 크고 도전 그 자체가 우리 사회에 던져주는 메시지도 클 것이다.

이병기 경제부 차장 ey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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