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rrative report]한국에서 미혼모로 산다는 건…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5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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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는 없었다… 세상은 내가 마신 공기조차 아까워 하는 듯했다
자 아이 키운 지 10년… 취직은커녕 가족과도 연을 끊었다
진 삶, 그래도 내겐 딸이 있다… 내 꿈은 ‘좋은 엄마’다


한국 사회에서 미혼모는 '주홍 글씨'다. 미혼모라는 낙인이 찍히는 순간 주변에서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진다. 입양아이의 대부분이 미혼모 자녀라는 점은 이 같은 사회적 인식을 보여준다. 사회적 편견 속에서 딸아이를 혼자서 10년 넘게 키워온 미혼모 이야기를 소개한다. 본인 요청에 따라 기사는 가명(최유선)으로 처리됐다.<편집자 주>

#첫 만남#
초등학교 3학년 딸 ‘로로’(별명)가 어버이날 엄마에게 준 카드. “낳아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라는 글이 보인다.
초등학교 3학년 딸 ‘로로’(별명)가 어버이날 엄마에게 준 카드. “낳아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라는 글이 보인다.

최유선 씨(34)와 처음 만난 것은 5월7일 금요일 오후였다. "난 잘 살고 있는 미혼모 케이스가 아녜요"라며 인터뷰를 몇 번이나 고사하는 그를 가까스로 설득해 만날 수 있었다.
서울시 동대문구의 전철 역 근처 주택가였다. 키가 훌쩍 크고(나중에 물어보니 키가 179cm였다.) 마른 여자가 나타났다. 핑크색 후드티에 청바지를 입은 그는 자전거를 타고 있었다. 앞으로 간호원이 꿈으로, 3년 제 간호전문대에서 바로 오는 길이었다. 건강하고 씩씩해 보였다. 병으로 사선(死線)을 넘나들었던 것이 믿기지 않았다. 그는 "건강에 아주 신경 쓰고 있다"고 했다. 또 쓰러지면 큰일이니까.
좁다란 골목 안 쪽에 작은 파란색 대문 집. 작은 방 세 개가 전부였다. 커다란 풍선과 강아지 인형이 마루를 굴러다니고, 알록달록한 종이접기가 냉장고에 붙어 있다.
학교에서 돌아온 딸아이 로로(별명, 9)가 엄마를 반긴다. 로로는 친구 한 명과 같이 놀고 있던 참이다.
"엄마 내가 선물 줄 거 있어"
"뭔데?"
"학교에서 만든 거야" 어버이날 카드다.
"카드네. 고마워"
파란색 줄을 정성스럽게 친 편지지에 로로는 이렇게 썼다.
"엄마께. 안녕하세요? 저 ○○○예요. 저를 낳아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그러니까 공부도 열심히 할께요! 학교도 열심이 다니고 엄마를 기쁘게 해드릴께요 ♡♡♡"
카드를 들여다보던 유선 씨가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얘는, 맨날 낳아줘서 고맙다네." 그가 살짝 웃는다.

#아이, 공부, 아르바이트#
유선 씨는 "1차 도전은 병 때문에 무너졌지만 2차 도전 중"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도전만큼이나 싸워야 하는 것들이 너무 많다고 했다. 생활고, 편견, 가족들의 마음을 돌리는 것. 또 아이가 상처받지 않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 그는 "내가 혼자 열심히 살아서만 되는 게 아닌데…."라며 "혼자 이걸 짊어지고 생활하는 게 너무 힘들다"고 토로했다.
엄마를 본 로로가 어리광을 피우고 싶어 했다. 하지만 유선 씨는 아이와 같이 있을 시간이 없다. 인근 병원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아이 간식을 챙겨주고는 다시 가방을 걸쳐 멨다. 오후 6시부터 10시까지 병원에서 입원 접수 등의 일을 한다. 집에 오면 오후10시 반. 학교 공부를 마치고 새벽 2, 3시가 돼서야 잠을 잔다. 학교수업은 다음날 9시에 시작한다. 그의 일상은 몇 년 째 이렇게 고되다.

#임신, 출산, 그리고 미혼모#
'로로 아빠'가 됐어야 하는 유선 씨의 남자친구는 부잣집 막내아들로 태어나 여리게 자란 동갑내기였다. 대입에 낙방하고 재수할 때 만나 3년 동안 사귀었다. 남자친구와는 거의 매일 만났다. 아주 밀접한 사이였다. 여자친구들도 별로 만나지 않았다.
임신 사실은 몇 주 후 알았다. 그런데 이 소식을 전해들은 남자친구 표정이 공포로 일그러지는 것을 봤다. 유선 씨는 "내가 어떤 선택을 할 지 알았기에 무서워하지 않았을까 싶다"고 했다.
배반감과 분노에 휩싸인 유선 씨는 그냥 연락을 끊었다. 그러면 찾아올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남자친구는 찾아오지 않았다. 가끔 전화하긴 했는데 도리어 자기가 힘들다고 징징댔다. 유선 씨는 "내가 아이 둘을 키워야 하게 될 것 같아 아예 연락을 끊었다"고 했다.
남자친구가 떠나고, 혼자 고민해야 했다. 당시 친구들이 제시한 방안은 ①헤어지고 낙태한다 ②헤어지고 출산한다 ③출산하고 결혼한다 등 세 가지였다. 어느 것도 쉬운 선택이 아니었다. 그는 결국 ②안을 선택했다.
유선 씨보다 두 살 위인 언니 유진 씨는 "임신하고 6개월 째 되어서야 임신한 줄 알았다"고 했다. 본인이 미혼모 수속 다 밟고, 그러고 나서야 밝혔다는 것이다. 유진 씨는 "원래 모든 일을 혼자 결정하는 아이"라며 "독립성이 강하고 한 번 선택한 것에 대해 끝까지 책임지려고 하고 노력하고 사는 아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유선 씨 부모는 "아이를 지우라"며 펄쩍 뛰었다. 출산을 고집하자, 부모는 동네 사람들이 알까봐 이사까지 했다. 불같은 성격의 어머니는 지금도 그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현재 부모와는 사실상 의절한 상태다.
유선 씨는 25세가 되던 2001년 서울 서대문구 소재 애란원(미혼모 생활시설)에 혼자 들어가 아이를 낳았다. 출산 당일 '축하 인사'가 아닌 '한숨 소리'와 '위로'의 말이 들렸다.

#내 삶을 인정해 주세요#
유선 씨는 "사회가 날 인정해 주는 것만이 내가 살아가는 이유고 목표였다"고 말했다. 학교 성적은 무조건 1등이어야 했고 좋은 직장과 괜찮은 연봉을 좇아 정신없이 뛰었다.
하지만 취업할 때 여지없이 내쳐지고, 사람들의 편견어린 시선에 이리저리 치이면서 '노력 이외 더 필요한 게 있다'는 걸 알았다. 유선 씨는 "부정적인 많은 '의미'가 '미혼모'라는 말 하나에 압축돼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고 말했다.
취업 할 때는 미혼모라는 사실을 밝히면 그 자리에서 탈락이었다. 전문대학을 졸업한 2005년 겨울, 디자인 관련 중소기업에서 면접을 봤다. 연봉 이야기도 거의 다 끝날 무렵 유선 씨는 용기를 내 말했다.
"말씀드려야 할 게 있는데요. 제가 아이를 혼자 키워요. 미혼모예요"
순간 사장의 얼굴이 심하게 구겨졌다.
"그런 건 처음에 이야기했어야지. 괜히 내 시간만 뺏었잖아. 내가 얼마나 바쁜 사람인데!"
소리 지르는 사장을 두고, 유선 씨는 그냥 뒤돌아 나왔다.
대개 이런 식이었다. 최종 면접까지 갔어도 미혼모임을 밝히면 전화 통화로 끝났다.
"우리 회사에 어울리지 않는 분인 것 같습니다. 출근하지 않아도 됩니다."
"사람이 필요했는데 안 뽑기로 했어요."
혹은 "다시 생각해 볼게요" 하고는 끝내 전화오지 않았다. 그렇게 아홉 번, 불러주지 않는 면접을 치렀다. 결국 미혼모임을 속이고서야 연봉 1800만원의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지난해 7월30일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미혼모 자립지원의 주요 쟁점과 해법'을 주제로 연 제3차 가족·보육정책 포럼에서였다.
방청객 석에서 한 사람이 "미혼모들은 잘생긴 남자한테 반해서 미혼모가 되는 불행을 겪는다"라고 말했다. 이 때 유선 씨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내가 그 잘생긴 남자한테 반해서 미혼모가 된 당사자입니다"라고 외쳤다. 그리고 미혼모가 된 사연, 시설(애란원) 입소, 먹고 살기 위해 닥치는 대로 했던 아르바이트, 공부, 갑자기 닥친 건강악화에 대해 차분하고 당당하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당시 포럼에 함께 있던 정선옥 한국미혼모가족협회 교육지원팀장은 "듣는 내내 흥분됐고 떨렸다"며 "힘들었던 지난날에 대한 북받치는 감정을 꾹꾹 눌러가며 미혼모가 처한 현실과 현 정책의 문제점에 대해서 말하는 유선 씨를 마음으로부터 응원했다"고 말했다.

#일찍 철 든 딸아이#
초등학교 3학년 된 딸아이는 굳이 이야기 하지 않아도 엄마가 미혼모임을 저절로 알았다. 아이들 보는 책에서 '미혼모'라는 단어를 보고 어느 날 엄마에게 물었다.
"미혼모가 뭐야?"
"결혼 안 하고 아이 낳아서 기르는 사람"
"엄마랑 이모들(미혼모 생활시설에서 만난 사람들) 다 결혼 안하고 아이 기르는데, 다 미혼모야?"
"응"
"어쩐지!"
유선 씨는 이런 이야기가 딸아이 친구들 부모 귀에 들어가 아이가 상처받게 될까 두렵다. 그래서 덧붙였다.
"엄마가 죄 지은 건 아니지만 애들한테 그런 얘긴 안 했으면 좋겠어. 엄마 아픈 얘기거든"
아이는 엄마가 미혼모라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 같다. 그런데 가끔 거짓말도 한다. 어른들이 "아빠는 어디 있니. 아빠는 뭐하니" 물어보면 애가 "아빠 일해요" 한다고. 유선 씨는 왜 거짓말 했느냐고 굳이 묻지 않았다.
로로는 가끔 엄마를 위로할 줄도 안다. 엄마가 몰래 울면 몰래 우는 것도 안다. 그럴 땐 살그머니 다가와서 "엄마, 힘들어하지 마"라고 한다.
로로는 밝고 주장이 강한 아이다. 로로는 "경찰이 될거야. 남의 물건 훔치거나 살인하고 도망가는 나쁜 사람들 잡아가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할아버지가 해군이어서 저도 따라하고 싶다며.
하지만 어딘가 불안해하는 모습도 보였다. 로로는 집으로 올 때 주위를 살피면서 들어온다고 했다. "엄마 있을 땐 괜찮은데 아무도 없을 때는 막 뛰어와요. 나쁜 사람 눈에 띄면 안 되니까"

#갑자기 찾아온 병#
유선 씨는 어렵사리 취직한 회사도 6개월 채 다니지 못했다. 과로로 '대동맥 박리(심장과 연결된 대동맥 내부가 찢어지며 분리되는 것)'라는 희귀한 증상이 나타난 것이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월요일 아침.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으려고 몸을 숙이다 뒤로 주저앉았다. 어마어마한 통증이 느껴졌다. 통증 때문에 모든 것이 일그러져 보였다. 119에 실려 병원으로 향하는 구급차 차창 밖 풍경은 너무나 평온해 보였다. 그렇게 정신을 잃었다.
정신이 들고 보니 중환자실이었다. 며칠 지나있었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왔다. 생각은 아주 느리게 흘러갔다. 누군가 마음속에서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일까. "네게 하고픈 이야기가 있는데 듣지 못하는 네게 말할 방법이 없었어. 너는 내가 지키고 있기에 안전하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죽고 싶었는데, 세상이 너무 버거워서 매일 죽기를 바라면서 살고 있었는데 그렇게 소망하던 죽음조차도 내게 허락하지 않다니. 얼마나 더 이 험하고 힘든 세상을 살아야 내게 죽음을 안겨주시려나…' 아무도 그 눈물의 진짜 의미를 알지 못했다.
유선 씨는 아픔의 근원지로 생각의 여행을 떠났다. 한번도 되돌아보지 않고 살았던 그 아픈 이름 '미혼모'.
유선 씨는 "미혼모가 된 뒤 마치 지구의 공기조차 자신이 마시는 것을 아까워하는 것처럼 느꼈다"고 했다. 그래서 "나 같은 사람도 살아도 되는 사람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뭐든지 열심히 했고 내가 나 스스로를 죄인 취급 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 거짓 당당함과 노력이라는 가면을 쓰고 살았다"고 말했다.
거기서 유선 씨는 신의 음성을 들었다. "인정받기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사랑받으려 애쓰지 않아도 네가 어떤 모습이든 네가 무슨 일을 하든 나는 항상 네 옆에 있다."

#모든 것을 잃고 난 후 얻은 것#
아프고 나서 많은 것을 잃었다. 그동안 포기하고 살았던 것들, 즉 고된 몸을 억지로 추스르고 디자이너 공부를 하며 보낸 시간, 아이와 같이 보내지 못했던 시간, 한 순간이라도 편히 쉬지 못했던 그 고된 시간들. 병이 나자 돈과 직업을 잃었을 뿐 아니라 꿈도 잃었다. 계속 디자이너 일을 하는 것은 무리였다.
하지만 얻은 것이 있다. 무엇보다 삶에서 아이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아이와 정말 행복한 시간 많이 보내야 한다고 다른 엄마들에게 말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쉬는 날이면 아이와 공영 도서관에 가서 하루 종일 보낸다. 3000원에 돈가스가 점심으로 나오고 만화영화도 공짜로 보여주는 곳.
유선 씨는 "아이가 나한테 받은 상처가 있을 것 같아 마음 아프다"고 말했다. '아빠 없으니까 저렇지'라는 말 듣지 않으려고 '모범이 돼야 한다, 잘해야 한다는 생각'에 애를 많이 혼냈다는 것이다. 사회가 유선 씨에게 짐을 짊어지도록 요구했던 것처럼 유선 씨가 아이에게도 똑같이 요구한 것 같다고.
그래서 후회를 많이 한다. "애어른 같다" "의젓하다" 소리를 듣는데, 예전에는 칭찬으로 들렸지만 지금은 안쓰럽다고.
인터뷰 말미에 유선 씨는 글 하나를 건네줬다. 교회를 다니는 유선 씨가 목사님께 드린 글이다. 제목은 '나에게 하느님이란'. 아래 전문을 소개한다.

여느 날과 다름없는 월요일 아침이었다.
꿀맛 같은 주말을 보내고 힘든 한 주가 될 듯한 그런 월요일 아침 말이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몸이 마냥 무거운 느낌이었는데, 월요일 아침이라서 그런가 보다 하고 생각했다.
회사에서 날 기다리고 있을 일의 양을 생각해 보면 몸만 무겁지는 않으니 말이다.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으려고 몸을 숙이고 익숙한 손길로 샴푸 질을 하고, 순간 이상한 느낌이 몸을 엄습했다.
잠시 날 고민에 빠지게 만들었다. 린스를 쓸까, 아니면 지금 몸을 일으킬까.
린스를 쓰기로 결정했다. 린스를 손에 담고 머리를 부드럽게 감싸는 순간 나는 뒤로 주저앉았다.
그렇게 나는 혼돈 속으로 빠져들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지 못했지만, 한 가지 정확하게 인지되는 사실은 어마어마한 통증 속에 놓여져 있다는 것이었다.
통증으로 인해 모든 것이 일그러져 보였다. 목소리조차 상실된 것 같았다.
무슨 힘으로 화장실을 기어 나왔을까.
엄마가 놀라서 소리를 지르고, 아이도 놀랐는지 날 빤히 쳐다보는데 안심시켜 줄 어떤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119가 출동하고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그날 병원으로 향하는 구급차 차창 밖 풍경은 너무나도 평온해 보였었다.
응급실에 도착하고, 어딘가로 이동하고, CT도 찍고, 응급실 옆 베드의 아저씨가 죽어가는 모습도 지켜봤다. 나는 이 일들이 사실인지 꿈인지 명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나는 통증과 모르핀이라는 혼돈 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혼돈 속을 헤치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중환자실이었다. 며칠 동안 모르핀을 계속적으로 투여했다고 했다.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무언가를 생각할 때면 생각의 속도를 손으로 잡을 만큼 느리게 움직였지만 그래도 생각이라는 것을 할 수 있었다.
나는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왔던 것이다.
주치의 선생님은 아직 안심할 수 없다고 했다.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고….
그때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너는 안전하다고, 너에게 하고픈 이야기가 있다고, 너와 이야기 나누고 싶었지만, 듣지 못하는 너에게 말할 방법이 없었다고, 너는 내가 지키고 있기에 안전하다고….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나는 너무도 죽고 싶었었다. 세상이 너무 버거워서….
매일을 죽기를 바라면서 살고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소망하던 죽음조차도 내게 허락하지 않는 그에게 너무나도 화가 났다.
'얼마나 더 이 험하고 힘든 세상을 살아야 나에게 죽음을 안겨주시려나? 나에게는 죽음조차도 사치인가?'
그렇게 정신을 차린 그날은 서러워서 너무 억울해서 하염없이 울기만 했다.
아무도 내가 우는 진정한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렇게 며칠이 흘렀다.
죽었으면 좋겠다는 나의 소원은 점점 가능성을 잃어가고 있는 듯 했다.
그러다 문득 궁금증이 올라왔다. 나에게 정말 이야기를 하고 계셨을까? 이야기를 하고 계셨다면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고 계셨던 것일까? 라고.
그리고는 나의 아픔의 근원지로 생각의 여행을 떠났다. 한 번도 되돌아보지 않고 살았던 그 때로 말이다. 그 아픈 이름 미혼모로….
미혼모가 된 뒤로 나는 마치 지구의 공기조차 내가 마시는 것을 아까워하는 것처럼 느꼈었다. 그래서 나 같은 사람도 살아도 되는 사람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뭐든지 열심히 했다. 할 수 있는 일은 가리지 않고 했고 내가 스스로를 죄인 취급 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거짓 당당함과 노력이라는 가면을 쓰고 살았다.
나는 생각이라는 것을 하며 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정말 열심히 살기에도 바쁜 일상이었다.
누군가 너처럼 열심히 사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는 이야기를 하기라도 하면, 더욱 더 노력을 했다. 나는 조금도 행복하지 않았다.
혹시 내가 정말 이야기를 듣지 못하고 있었던 걸까?
내가 남자친구의 버림을 받았을 때
그리고 혼자 아이를 낳기로 결정하고, 집을 떠났을 때
아이를 출산하면서도 축하의 인사가 아닌 한숨소리와 위로의 말만 들었던 그 순간에도 그 때도 나와 함께 계시면서 나에게 이야기를 하고 계셨을까?
가족의 기대를 복구하기 위해서 아이와 굶주림을 견뎌내고 있을 때에도 함께 계셨다는 것을 말이다.
그 분은 그렇게 내게 말씀하고 계셨다.
'인정받기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사랑받으려 애쓰지 않아도 네가 어떤 모습이건 네가 무슨 일을 하여도 내가 옆에 있다는 것을….'

나에게 하나님은 바로 이런 분이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아멘.

PS. 이후의 삶은 많이 변한 듯 또는 전혀 변하지 않은 듯 그렇습니다.
하지만 확실한 변화 한 가지는 알고 있습니다. 나는 행운아이며 행복합니다.

김현지기자 nuk@donga.com
::narrative report::
내러티브 리포트(Narrative Report)는 삶과 현실을 담는 새로운 보도 방식입니다. 기존의 기사 형식으로는 소화하기 힘든 ‘세상 속 세상’을 이야기체(Storytelling)로 풀어냅니다. 동아일보는 내러티브 리포트를 통해 독자 여러분께 더욱 깊이 있는 세상이야기를 전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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