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rrative report]철수한 현대아산 직원 2명을 통해 본 ‘격변의 대북사업’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5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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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정주영 회장이 소떼 몰고 북으로 간 지 12년… 철수한 현대아산 직원 2명을 통해 본 ‘격변의 대북사업’

《1998년 6월 16일 판문점 내 군사분계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황소 500마리를 이끌고 북으로 넘어갔다. 이어 넉 달 뒤 정 회장은 소 떼 501마리를 데리고 또다시 방북했다. 옆에 있던 한 기자가 물었다. “왜 하필 501마리인가요?” 당시 팔순을 넘긴 정 회장이 대답했다. “마지막 한 마리에는 현대가 앞으로 이 길을 계속 가겠다는 의지가 담겼습니다.” 그해 11월 18일 금강산 해상 관광이 열린 이후 12년을 이어온 현대아산의 금강산 관광 사업이 최근 중단 위기에 처했다.

현대아산은 금강산 관광 지역은 물론 개성공단의 터를 닦은 기반 사업자였다. 현대그룹은 대북 사업 과정에서 불법 대북 송금 사태로 물의를 빚었고, 냉철한 경영자의 시각으로 사업 전망을 하지 못했다는 비판도 받는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금강산 관광 등 과거에는 상상도 못했던 수준의 남북 교류를 이뤄냈다는 평가도 있다. 대북 사업 초창기부터 북한 현지에서 실무를 담당한 직원 두 명을 통해 현대아산의 지난 12년 궤적을 살폈다.》
10년간 금강산 관광가이드 등 근무한 길선영 씨

아끼던 인형 두고 왔다… 돌아올 거라는 주문 걸며
北안내원과 친해졌는데… 금강산과 인연은 짧았다
“통일된 다음에 보자우” 인민군의 말 아직도 쟁쟁


가방 속 짐을 넣었다 빼길 사흘째. 결국 서울로 돌아오는 날 새벽 아끼던 인형과 이불, 컵을 가방에서 뺐다. 여자 나이 서른셋에 웬 인형 타령이냐고 하겠지만, 금강산을 찾은 한 관광객이 건넨 추억의 물건이다. 금강산에 다시 돌아올 기약도 없다. 하지만 이렇게 평소 아끼던 물건이라도 남겨둬야 나중에 돌아올 것이라는 주문을 스스로에게 걸었다.

현대아산 운영팀 소속이던 길선영 씨(33·여)가 금강산에서 보낸 10년의 세월은 이렇게 일단락됐다. 이달 3일이었다.

길 씨의 ‘본국 소환’은 이번이 두 번째다. 2008년 7월 11일 박왕자 씨 피격 사망사건으로 금강산 관광이 중단되면서 그는 그해 8월 들어와 재택근무를 시작했다. 그때 컴퓨터 자격증을 따고 요리학원에도 다녔다. 지난 8년간 금강산에서 지겹도록 탔던 산이건만 주말에는 관악산이며 도봉산엘 틈틈이 올랐다. 언제라도 다시 금강산으로 갈 수 있다는 생각에 몸을 단련한 것이다.

결국 그는 소원대로 1년 1개월 만인 작년 9월 인솔담당자로서 현대아산 사무소와 북측의 구선봉 통행검사소를 오가며 금강산을 다시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금강산은 길 씨를 끝내 품어주지 못했다. 북한이 금강산 자산 동결과 상주 인원 철수 결정을 내리면서 그는 8개월 만에 또다시 짐을 싸야 했다. “길 선생, 통일된 다음에 보자우!” 평소 무뚝뚝하던 북측 통행검사소 군인은 그가 떠나던 날 무겁기만 하던 입을 열었다.

그가 2000년 현대아산 협력업체에서 관광가이드를 처음 시작할 때도 북한 사람들은 다가서기 쉽지 않은 존재였다. 금강산 등산로 중간중간 자리 잡은 포스트에서 북측 안내원과 함께 근무를 설 때면 온 신경이 곤두섰다. 혹시나 생길 수 있는 비상사태에 대비해야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1999년 6월 관광객 민영미 씨가 금강산 관광 도중 북측 환경관리원에게 귀순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엿새 동안 북한 당국에 억류되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어색한 관계’에 변화가 생겼다. “길 선생, 정상 장악하기(오르기) 전에 했던 말이 옳지 않던데….” 옆에 있던 중년의 북측 여성 안내원이 조용히 입을 뗐다. 길 씨가 관광객들에게 해준 금강산 안내 설명에 오류가 있다는 지적이었다. 그 안내원은 북한 간부를 상대로 가이드 역할을 했던 베테랑이었다. 이후 길 씨는 큰언니뻘인 그를 학교 선생님처럼 따랐다. 금강산 관련 노래부터 시조, 송시열 등 조선시대 문사들이 남긴 명언까지 그에게서 배웠다.

나중에는 다른 북측 안내원들과도 언니, 동생 사이가 됐다. “언니, 아직도 바지(신랑감) 못 찾았나?” 서른을 넘겨 북으로 치면 노처녀 대열에 합류한 길 씨에게 나이 어린 안내원들은 곧잘 우려하는 눈길로 말을 걸었다. 한 20대 여성 안내원은 ‘눈 까집기 수술(쌍꺼풀 수술)’을 하고 와서 속눈썹에 자꾸 찔린다고 길 씨에게 하소연했다. “언니, 청포묵을 두 주만 먹으시라요. 살이 잘 빠집네다.” 어느새 이들의 대화는 ‘20, 30대 젊은 여성들만의 수다’로 바뀌어 있었다.

길 씨는 2005년까지 현대아산 협력업체에서 관광가이드를 하면서 그만두고 싶었던 적도 여러 번 있었다. 적막강산에 숨이 막혔고, 하루 4∼5시간씩 산에 올라야 하는 체력 부담도 만만치 않았다. 당시 만났던 북한 친구들은 그에게 버틸 수 있는 큰 힘이 됐다.

여기에 감격에 찬 남측 관광객들의 모습을 볼 때면 늘 뿌듯했다. 2001년 금강산 구룡연 관광코스에 있는 ‘신계사’에서도 그랬다. 6·25전쟁 때 폭격으로 주춧돌만 남은 절에 70대 할머니가 오랫동안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그의 손에는 한복을 입은 젊은 부부가 전쟁 전 이 절에서 찍은 빛바랜 흑백사진 한 장이 쥐어져 있었다. “이 자리가 맞을 거야…. 그래 여기였어….” 이젠 50대가 된 딸 옆에서 할머니는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당시 그의 남편은 신혼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징병된 뒤 소식이 끊겼다고 했다.

이 대목에서 길 씨의 목소리가 살짝 잠겼다. “금강산 관광은 다른 관광과는 질적으로 달랐어요. 뭔가 깨달음을 주는 관광이라고 할까요. 이젠 계약이 끝나서 현대아산 직원은 아니지만 기회가 주어진다면 결혼해서 만삭이 되더라도 다시 돌아갈 거예요.”
금강산호텔 공사 현장소장 맡았던 서용규 부장
미완의 현장 둔채 온것은 ‘건설밥’ 20년만에 처음
덕분에 아들과 목욕탕 갔다… 하지만 걱정이 앞선다
北과 씨름끝에 지은 호텔 사용 않으면 망가질텐데…


말하지 않아도 안다. 아내도 내심 불안해한다는 것을….

정말 오랜만에 초등학생 아들과 목욕탕도 가고 축구장에도 다녔다. 남들은 북한 땅에서 7년을 고생했으니 잠시라도 편히 쉬라고 했다. 하지만 현대아산 서용규 부장(47)도, 그의 아내도 서로 내색하진 않았지만 ‘이대로 재택근무로 눌러앉으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 앞섰다. 현대아산은 대북사업 난항으로 한때 1080명이던 직원을 330명으로 줄였다. 최근에는 남은 직원 일부를 정상 월급의 70%만 지급하는 재택근무로 전환했다.

작년 12월 4일 서 부장은 20년 ‘건설 밥’을 먹은 이래 처음으로 미완의 공사 현장을 북에 둔 채 집으로 왔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맡은 공사를 깔끔하게 처리해 북에서도 ‘해결사’로 통하던 그였기에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금강산 관광지구에서 5년을 보내고 2008년부터 개성공단 내 지역난방시설 공사에 투입됐다.

북한은 2008년 12·1 통행차단 조치에 이어 작년 300달러 임금인상 요구 등으로 개성공단을 강하게 압박했다. 이에 분양업체들이 잇달아 입주를 포기하면서 수요 부족으로 지역난방 공사까지 중단됐다. 현장에 있던 현대아산 직원들은 모두 본사 복귀 명령을 받았다. 다행히 서 부장은 며칠 뒤 본사 기전부로 발령받아 일을 계속할 수 있었다.

서 부장이 북한 땅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때는 2003년 9월 1일. 당시도 비상상황의 연속이었다. 그해 세계적으로 유행한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ARS·사스)으로 4∼6월 62일간 금강산 관광이 중단됐다. 혼란 속에 금강산호텔 리모델링 공사 현장소장으로 부임한 서 부장은 사활을 건 ‘속도전’에 나서야 했다. 그해 9월부터 금강산 육로관광 길이 열리면서 관광객이 폭발적으로 늘어 숙박시설이 크게 부족해졌기 때문이다. 이전까지는 금강호, 봉래호 등 배를 타야만 금강산에 들어갈 수 있었다.

공사 일정이 급박했지만 ‘분단의 벽’은 높았다. 북측 현장인력 500명을 동원해 마무리 공사에 한창이었을 때였다. 엘리베이터 설치를 마친 뒤 시운전에 들어갔는데 이를 신기해하던 한 북한 근로자가 층마다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서둘러 건축자재를 올리려던 남측 직원이 순간 가벼운 욕설을 내뱉었다. 그것으로 공사 현장은 그대로 멈춰 섰다. 현장에 있던 북측 행정지도원이 “남조선 직원이 우릴 무시했다. 용납할 수 없다”며 제동을 건 것. 결국 우여곡절 끝에 해당 직원은 남한으로 소환됐다.

양측의 이런 ‘기 싸움’은 공사기간 내내 서 부장을 괴롭혔다. 작업 방식에 대한 견해차도 그랬다. 서 부장은 매일같이 북측 근로자들의 업무가 바뀌는 것에 놀랐다. 전날 미장일을 하던 근로자가 다음 날 배선작업을 하다 그 다음 날 배관공사에 투입되는 식이었다. 남측 관계자들로선 작업 방식을 근로자들에게 새로 가르쳐야 하는 비효율성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게다가 숙박시설 부족에 대한 관광객들의 불만도 극에 달한 상황이었다.

서 부장은 고민 끝에 매일 저녁 북측 관리인력과 회의를 하면서 설득에 나섰다. 처음에는 남한 회사가 자신들의 작업 방식까지 간섭한다며 강하게 맞섰다. 하지만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휴일도 없이 공사에 매달리던 현대아산 직원들의 열정이 북측 관계자의 마음을 조금씩 움직였다. 이들은 결국 남측의 작업 방식을 받아들였고, 나중에는 북한 공휴일에도 작업인력 일부를 보내와 공기를 맞출 수 있도록 도와줬다.

1년 반의 공사를 마치고 금강산호텔을 준공하던 날. 서 부장과 끊임없이 신경전을 벌였던 북측 공사 지배인이 엷은 미소를 띠며 말없이 악수를 청했다. 우뚝 선 건물을 바라보면서 그는 마음속으로 뜨겁고도 묵직한 뭔가를 느꼈다. “한창 힘들 땐 금강산에서 나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가 가장 기억에 남네요. 아들과 아내에게 제가 지은 금강산호텔을 직접 보여줬을 때 참 행복했죠.”

서 부장에게 5년을 보낸 금강산 관광지구의 남측 자산이 최근 동결됐을 때의 소회를 물었다. 그다운 답변이 돌아왔다. “장기간 출입이 막혀 환기가 안 되면 시설물이 금방 망가질 겁니다. 제 손때가 묻은 것들이어서 그런지 가슴이 더 아프네요. 빨리 금강산으로 돌아가서 제 손으로 복구하고 싶습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내러티브 리포트(Narrative Report)는 삶과 현실을 담는 새로운 보도 방식입니다. 기존의 기사 형식으로는 소화하기 힘든 ‘세상 속 세상’을 이야기체(Storytelling)로 풀어냅니다. 동아일보는 내러티브 리포트를 통해 독자 여러분께 더욱 깊이 있는 세상이야기를 전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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