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눈/기 소르망]‘아시아의 세기’ 아직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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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1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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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20개국(G20) 회담이 서울에서 개최되는 것을 계기로 올해가 ‘아시아 세기의 시작’이라고 주장한 몇몇 한국 언론이 있다. 최근 몇 가지 사건이 이런 과장된 해석에 근거를 제공한 것으로 보인다. 우선 중국이 독일의 수출액을 넘어섰다. 그러나 이 통계는 단지 중국에서 조립되는 수출품까지 포함하기 때문에 적절하지 않다. 또 다른 논거는 한국이 프랑스를 제치고 아부다비 원자로 건설을 따낸 것이다. 한국의 성공임을 부인할 수 없지만 과장해서는 안 된다. 한국은 웨스팅하우스의 기술을 사용하는 미제(美製) 원자로를 건설하고 운영한다.

서구로부터 자유로운 혁신 드물어

물론 아시아의 성공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아시아의 돌파는 서구의 불황과 대조된다. 서구의 경제위기는 끝나려면 멀었다. 미국과 유럽 정부는 경기부양에 그렇게 많은 돈을 퍼부었는데도 경제가 되살아나지 않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듯하다. 미국의 버락 오바마 정부, 프랑스의 니콜라 사르코지 정부, 영국의 고든 브라운 정부 모두 공적 지출과 복지국가의 강화가 결국 기업가의 등뼈를 부러뜨린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아시아 정부는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다. 한국은 빈곤층 지원과 동시에 노동시장 규제를 풀었다. 아시아는 위기를 자유시장 메커니즘을 강화하는 기회로 사용했다.

그렇다고 금세기가 아시아의 세기라고 말하기는 이르다. 도대체 아시아란 뭘 말하나? 아시아 경제체제 같은 건 없다. 중국의 국가자본주의는 일본과 한국의 사적 자본주의와 같은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인도는 여전히 대체로 농업경제다. 아시아에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 유럽연합(EU) 같은 조정기구가 없다. 미국이 아시아를 떠난다면 아시아는 전쟁의 위협 속에 놓이든가, 최소한 무역에 큰 차질을 빚을 것이다. 아시아의 안보를 아시아의 군대로 지탱할 수 없는 한 아시아의 세기라고 말할 수 없다.

아시아의 혁신(innovation) 점수는 저조하다. 중국의 수출품은 값싼 노동력 외에 어떤 부가가치도 생산하지 못한다. 일본과 한국은 중국보다 훨씬 창의적이지만 여전히 서구에서 발명된 상품과 서비스를 개량하는 수준에 있다. 원인은 아시아적 암기식 교육이다. 아시아의 학생은 기회가 닿는 한 미국이나 유럽의 대학교로 떠난다. 반대로의 두뇌이동은 없다.

게다가 아시아의 발전은 서구적 가치의 수용과 관련이 있다. 자본주의 민주주의 개인주의 성(性)평등 세속주의는 서구의 개념이다. 서구적 가치에 반발해 불교 유교 등 아시아적 가치를 내세우려는 시도가 없는 것은 아니다. 조화(Harmony)원리가 그런 것이다. 그러나 이 조화원리가 불행히도 중국에서 민주주의를 저해하는 방향으로 조작되고 있다.

東西가 아닌 글로벌의 세기 아닌가

아시아 세기의 근거가 부족하다고 서양의 지배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아니다. 서양은 대학 오락산업 군사력에서 우위에 있지만 영원히 그럴 수는 없다. 어쩌면 동서양 간 힘의 비교 자체가 낡은 것이다. 오늘날 모든 상품과 서비스는 글로벌하다. 서양만의 혹은 동양만의 휴대전화는 없다. 금융 파생상품도 마찬가지다. 중국이 미국 국채를 사면 누가 누구에게 의존하는 것인가.

대중문화를 보자. 한국 록 가수가 중국에서 큰 인기를 얻는다. 그들은 한국적인가 미국적인가. 차라리 글로벌하다고 말하는 게 옳다. 우리는 아시아의 세기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최초의 글로벌 세기로 들어가는 것인지 모른다. 세계화는 우리가 아직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새로운 문명이다. 부상하는 새 세계를 묘사하기 위해 적절한 말을 찾기 힘들 때 우리는 흔히 옛 개념에 매달린다.

기 소르망 프랑스 문명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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