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박상우의 그림 읽기]사랑, 무르익은 오곡백과처럼

  • 입력 2009년 9월 26일 02시 5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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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누군가를 깊이 사랑합니다. 하지만 사랑한다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습니다. 사랑이 충만한 상태를 깊이 호흡할 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해라고 말하는 순간 그녀는 자신의 감정이 본래와 다른 느낌으로 변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감정 상태를 말없이 전하려고 노력합니다. “느껴 봐.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아도 그것보다 더 깊은 감정을 느낄 수 있을 거야.”

사람들은 사랑이 거리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랑을 시작하면 서로 가까워지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합니다. 손을 잡고 입술을 맞추고 포옹하면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고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욕망에 시달립니다. 하지만 우주만물이 원래 하나이므로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만 특별한 하나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나에 대한 환상과 망상으로 인해 두 사람은 결국 타인을 확인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인간 세상의 모순어법이 탄생합니다.

사랑(Amor)이라는 말의 어원은 죽음(morte)을 반대(anti)한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살기 위해 사랑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인간에게 숨을 쉬는 행위, 밥을 먹는 일과 하등 다를 바 없는 생명활동입니다. 삶 자체가 이미 충만한 사랑이라는 의미입니다. 특별한 욕망의 도구로 만들기 위해 사랑한다는 말을 무차별하게 남발하는 건 오히려 진정한 사랑을 의심하게 만드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아무리 가까워지려고 해도 두 사람 사이에는 본질적인 거리가 존재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아무리 사랑한다고 말해도 언어로 채울 수 없는 내밀한 공허가 존재합니다. 그것을 깨친 사람은 사랑이 행동과 언어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는 걸 압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자신 사이에 가로놓인 거리를 존중하는 마음, 두 사람 사이의 여백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녀는 오곡백과가 무르익은 들길을 걸어갑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면서 사랑으로 충만한 심신을 느끼면서 자연과 하나가 됩니다. 무르익은 오곡백과는 스스로 풍요롭다고 소리치지 않고 스스로 익었다고 과장하지 않습니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견뎌낸 시련과 풍파는 결실의 의미를 더욱 풍요롭게 합니다. 설명하지 않아도 있는 그대로 사랑이 됩니다. 죽음에서 살아남고자 하는 생명활동으로서의 사랑이 절로 전달됩니다.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이 들길 맞은편에서 걸어옵니다. 그녀는 말없이 그의 걸음을 주시합니다. 한 걸음 한 걸음, 그의 발걸음에서 언어보다 깊은 사랑이 느껴집니다. 어느 지점에선가 그가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봅니다. 가을볕 아래서 두 사람의 사랑이 오곡백과처럼 내밀하게 익어갑니다. 감정이 영글어 언어보다 분명해지고, 배려가 여물어 사랑보다 굳건해집니다. 있는 그대로 생명이고 감사이고 또한 결실입니다.

박상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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