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 나의 길]<79>‘愛人敬天’ 도전 40년

  • 입력 2009년 9월 8일 02시 5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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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저절로 이뤄지는 것은 없다
주위의 ‘결사반대’ 뚫고 출근
결재서류 처음 봤을 땐 식은땀
서류 보따리 집에 들고와 공부

“너의 결심이 그렇다면, 내가 도와주마.”

내가 회사를 직접 경영하겠다고 발표하자 시댁과 친정, 회사 임원까지 주위 사람의 반응은 전부가 ‘결사반대’였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회사 망한다는 말이 난무했다. 심지어 당시 애경에서 사장을 맡고 있던 큰오빠는 임원 몇몇과 함께 회사를 떠나기도 했다.

하지만 단 한 분, 친정어머니는 내가 경영을 맡는 동안 살림과 육아를 맡겠다고 지원에 나서 주었다. 일제강점기 일본 쓰다 학원 영문과에서 공부한 신식 여성으로 일본 유학 중 아버지를 만나 결혼한 어머니만은 딸을 믿어줬다. 어머니는 자식에게도 경어를 썼고 잔소리를 하는 법이 없을 정도로 남다른 분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1972년 7월 1일 회사로 첫 출근했다. 의욕과 용기는 왕성했지만 막상 사장 자리에 앉고 보니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아침 정시에 출근해 사장실로 들어갔지만 한동안 직원들이 결재조차 받으러 오지 않았다. 처음 결재서류를 받아 들었을 때는 말 그대로 식은땀이 흘렀다. 이사회를 하는데 임원들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통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나는 다시 미국 유학생 시절로 돌아가기로 했다. 말도 안 통하던 미국 유학 처음 1년 동안 옷을 벗고 누워서 잔 적이 없었다. 누워서 자면 일어나지 못할 것 같아 책을 베고 책상에 앉아서 잤다. 장학금을 받으려면 상위권 학점을 유지해야 했고, 그러려면 미국 학생보다 공부량이 엄청 많아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보따리 사장, 야학 사장을 자처했다. 매일 퇴근할 때 서류를 한 보따리씩 들고 와 밤늦도록 혼자 공부하고 연구하며 업무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혼자 이해하기 어려우면 실제 서류를 기안한 담당 과장이나 부장을 불러서 설명을 듣고 배웠다. 지금도 나는 대부분의 경영자와 달리 임원보다는 직접 서류를 기안한 실무 사원에게 결재서류를 받곤 하는데 이런 결재 습관은 보따리 사장 시절 시작됐다.

이런 생활을 1년 정도 계속하자 회사 전반의 사정, 경영에 대해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대학에서 내 전공이 화학이었기 때문에 공장 쪽 일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었다. 이공계 전공 학생에게만 주어지는 전액 장학금을 받기 위해 선택한 전공이 13년 만에 제몫을 하게 됐다. 회사 경영에 대해 전문성과 프로의식이 부족하다는 단점은 오히려 경영에서 정도와 원칙을 지키는 장점으로 발휘됐다. 얄팍한 수나 전략을 택하기보다는 솔직함과 상식을 택하기로 했다. 오래지 않아 나의 이런 소신은 시험대에 올랐다.

내가 회사 경영에 뛰어든 지 1년 만에 1차 오일쇼크가 터졌다. 석유 가격이 폭등하면서 세계경제가 스태그플레이션에 빠져 선진국 경제성장은 마이너스에 신음했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어서 경기침체 인플레이션 국제수지 악화 등 삼중고에 시달렸고, 애경 역시 원료 수급난에 봉착했다.

계열사 가운데 막 공장 건설을 시작한 삼경화성이라는 회사가 있었다. 지금은 애경유화로 이름이 바뀌어 무수프탈산 생산량에서 세계 1위를 기록하고 있는 회사로 성장했지만 당시 삼경화성은 내가 경영 일선에 나서면서 공장 건설을 시작한 신생업체였다. 삼경화성은 PVC와 페인트의 원료가 되는 오소키실렌을 일본에서 전량 수입하고 있었다. 석유파동이 시작되자 일본으로부터 원료 공급이 중단될 위기에 처했다.

나는 당시 유공과 합작 사업을 하던 걸프사의 미국인 사장과 영업담당부장을 만나 상식적인 담판을 짓기로 했다. 나프타 분해공장을 갖고 있던 유공도 우리가 공장 가동을 중단하면 피해를 볼 것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우리가 원료가 떨어져 공장 가동을 중단하게 되면 걸프사도 손해 아닌가. 나프타와 오소키실렌의 물물교환을 하자. 일본과 이런 교환을 할 수 있도록 주선해 달라.”

삼경화성이 그들에게도 미래의 거래처가 될 수 있다는 장기적인 안목이 없지는 않을 터. 그러나 당시 걸프사에 이런 거래가 당장의 이익을 가져다줄 리는 없었다. 온갖 반대를 무릅쓰고 사장에 오른 나는 벼랑 끝에 선 기분이었다.

<장영신 애경그룹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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