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송현옥]아일랜드의 戀風

  • 입력 2006년 10월 25일 03시 01분


코멘트
최근 들어 각 분야에서 ‘아일랜드 배우기’가 한창이다. 교육계 인사는 유연하고 개방적인 사고를 지닌 엘리트 양성을 통해 부강해진 아일랜드를 벤치마킹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경제계에서는 개방적인 무역 정책과 노사 화합을 바탕으로 한 일관되고 실용적인 정부 정책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우리와 비슷한 수준의 경제력을 가지고 있던 아일랜드가 국민소득 3만 달러의 시대를 열고, 일명 ‘켈틱 타이거’로 성장하면서 아일랜드식 모델에 대한 동경의 물결이 우리 사회에 일렁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아일랜드 배우기’ 열풍 속에서 그들의 수준 높은 문화에 대한 논의는 찾아볼 수 없다.

우리나라의 아일랜드 배우기 역사는 사실 192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19세기 말의 아일랜드에서는 정치적인 투쟁뿐 아니라 문화운동을 통해 정신적인 독립을 이루려는 노력이 병행되어 전개되었다. 그리고 그 핵심에는 연극운동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상실된 민족 주체성을 되살리자는 모토에 가장 효과적이고 직접적인 예술 형태는 연극이라는 공감대가 아일랜드 문화예술인들에게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소극장 운동을 통해 잊혀진 켈트 민족의 신화를 부활시키고, 당시의 사회상을 묘사하였다. 이러한 아일랜드 문예부흥 운동은 일제 식민 통치 시절의 우리 문인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우리의 민족적 정체성을 확립하게 하는 원동력으로서의 연극운동을 벌이는 데 있어서 그 전범을 아일랜드 문예부흥 운동에서부터 찾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의 근대 연극은 이렇듯 식민지 현실을 비판하고 우리 민족의 주체성을 확립하는 데에 그 근본 취지가 있었다. 특히 근대 연극의 기념비적인 작품인 유치진의 ‘소’는 아일랜드 작가인 숀 오케이시의 연극에서 깊은 영향을 받은 것이다. 오케이시는 북아일랜드의 자치권 문제로 강경파와 온건파가 서로 논쟁을 벌이고 급기야 내전으로까지 발전하게 된 당시 아일랜드의 현실을 신랄하게 풍자하며 ‘민족주의’라는 이념에만 빠져 있는 지도자들을 어리석은 몽상가로 표현하였다. 그의 공연이 자신들의 영웅을 비하했다는 이유로 사람들은 극장 내 폭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폭동은 아일랜드 문예부흥의 꽃을 피웠던 작가의 한 사람인 존 싱의 공연장에서도 일어난 적이 있었는데, 자국민을 저속하게 그렸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렇듯 당시의 아일랜드 연극은 현실의 문제를 격렬하게 토로하는 논쟁의 장이었다. 사뮈엘 베케트와 같은 최고의 작가를 배출한 아일랜드의 연극은 지금도 사회를 비추는 거울로서, 모국에서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동시대 문화의 흐름을 주도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비록 당시의 아일랜드 국민은 자기 나라 사람들을 희극적인 반(反)영웅으로 그려 낸 것에 분노하였지만, 전 세계인들은 그들에게 자신의 이웃과도 같은 공감을 갖게 되었다. 술을 좋아하고, 땅에 집착하며, 허풍은 심하지만 예술적 감수성이 뛰어난 아일랜드인들의 기질은 우리 민족과 매우 닮았다. 우리가 아일랜드에 남다른 생각을 가지게 된 데에는 그러한 면이 작용하지 않았을까? 만일 그들의 진솔한 모습이 연극이나 영화를 통해서 알려지지 않았다면, 단지 가난한 나라 또는 아일랜드공화국군(IRA)과 같은 테러 집단의 나라로만 인식되었을 과거의 아일랜드! 지금 우리는 그 나라의 경제력과 사회 정책을 부러워하지만, 그 기저에 문화를 통해 세계와 소통하고, 유연한 사고방식을 체화하게 된 아일랜드의 국민 의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송현옥 세종대 교수·연극평론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