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나절만이라도 평범하게 생활해봤으면 좋겠어요”

  • 입력 2006년 7월 29일 08시 4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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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를 간호하고 있는 은정 씨.
할머니를 간호하고 있는 은정 씨.
현대판 ‘효녀 심청’으로 불리는 홍은정(30) 씨를 만나기 위해 28일 오후 서울 강서구 가양동을 찾았다. 은정 씨는 11평 남짓한 임대아파트에서 아버지 홍인길(59) 씨와 함께 살고 있었다.

집안에 들어서자 숨넘어가는 소리부터 들렸다. 은정 씨는 “오늘 비가 많이 와서 아버지 가래 끓는 게 더 심한 것 같다”며 아버지의 가슴을 토닥였다. 딸의 손길을 알아보는 듯 아버지의 숨결은 이내 평온해졌다.

은정 씨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전신마비가 된 지는 올해로 5년. 그는 꽃다운 20대를 아버지 병수발로 다 보냈다.

“처음엔 정말 억울했어요. 제게 왜 이런 불행이 닥쳤고,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많이 방황하고 힘들어했어요.” 지난 삶을 떠올리는 은정 씨의 눈가가 반짝였다.

“어머니 어디 계세요”

“제가 고3이고 남동생이 고1 때였죠. 어머니가 갑자기 사라지신 게…. 아침에 ‘학교 다녀올게요’하고 나갔는데 하교해보니 어머니가 없어졌어요.”

어머니의 실종은 아버지에게 큰 충격이었다. 아버지는 학원 강사 일을 그만두고 어머니를 찾아 전국을 떠돌았다. 7년을 수소문했지만 찾지 못했다. 아버지의 상심은 나날이 깊어졌고, 결국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당시 저는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어요. 병원에서 연락을 받고 부랴부랴 갔는데, 아버지는 이미 식물인간 상태였어요. 담당의사가 오늘을 넘기기 힘들겠다며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어요.”

하지만 의사의 예상과 달리 아버지는 이튿날 기적적으로 눈을 떴다. 그러나 전신마비가 찾아왔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후 병원에서 8개월여를 보냈다. 홍씨는 매달 여러 카드로 현금서비스를 받아 병원비를 댔다. 하지만 한계에 부딪혔다. 결국 퇴원해서 집으로 왔다.

남동생 양훈(28) 씨의 사정도 딱하다. 그는 어머니의 실종 충격으로 대인기피증에 시달리다 자폐증상으로 발전했다. 세상과 담을 쌓은 것이다. 학교도 가지 않더니 어느 날 홀연히 집을 나갔다. 몇 년 간 소식이 없다가 최근 집으로 돌아왔다. 이후 나갔다 들어왔다를 반복하고 있다.

“동생이 처음부터 장애를 가졌으면 정신병원에라도 등록했을 텐데…. 그게 아니었거든요. 주위에서 하라는 분들도 있지만 아버지에 이어 동생마저 장애자로 등록할 수 없었어요. 동생이 언젠가는 제 구실을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

은정 씨의 불행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2002년, 한점 혈육인 고모가 운영하던 학원이 파산했다. 빚더미에 오른 고모는 모시던 할머니를 은정 씨에게 맡겼다. 할머니도 류머티즘 관절염으로 인해 거동하지 못했다.

언제쯤 ‘빚’이라는 단어를 잊을까

그날부터 은정 씨는 할머니, 아버지 간병에 매달렸다. 아버지는 3시간마다 한 번씩 코에 이은 호스를 통해 음식을 넣어주고, 1시간에 한 번씩 가래를 뽑아줬다. 할머니는 끼니를 맞춰 먹였다. 매일 두 사람의 대소변을 받아내고, 냄새가 나지 않도록 닦아주고, 욕창이 생기지 않도록 수시로 몸을 뒤채줬다. 은정 씨는 그야말로 눈 붙일 시간도 없었다.

은정 씨의 극진한 간호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다. 대신 빚만 산더미처럼 늘었다. 일을 할 수 없는 은정 씨가 기댈 곳은 카드밖에 없었기에 카드빚이 눈 깜짝 할 새 1700만원으로 불었다. 이자만 월 40만원을 내야 했다. 더구나 2004년 7월부터는 원금까지 상환해야 했기 때문에 월 80만원을 내야 했다. 그러나 갚을 길이 없었다. 은정 씨는 매일 빚 독촉에 시달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2005년 초 ‘영세민보호법’이 마련돼 카드빚 상환이 연장된 것. 이후 빚 독촉은 없어졌지만 빚이 없어진 건 아니다. 영세민으로서의 삶이 종결되면 갚아야 한다.

현재 은정 씨는 매달 국가보조금으로 받는 40만원과 약간의 후원금으로 빠듯하게 생활하고 있다. 박스당 4만원이나 하는 유동식 3~4박스와 두유 4박스 비용, 선식비, 기저귀 값, 약값, 월세, 전기요금, 수도요금 등을 내고 나면 정말 남는 게 없다.

조카의 어려운 처지를 안 고모가 올해 5월, 할머니를 모시고 갔다. 고모도 빚더미에 앉아 있지만 조카에게 무거운 짐을 홀로 감당시킬 수는 없었던 것이다.

“반나절만이라도 평범하게 살았으면…”

“저는 장애아동들을 돌보고 가르치는 특수교사가 되고 싶었어요.”

하지만 은정 씨는 꿈을 이룰 수 없었다. 어머니 실종 이후 집안 살림을 도맡아해야 했기 때문. 힘겹게 돈을 벌어 대학을 마친 후 학원에서 초등학생을 가르쳤지만 그것도 잠시. 아버지가 쓰러지고, 고모의 파산 후 아버지, 할머니 병간호에 전념해야 했다.

어느덧 5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은정 씨는 바깥나들이를 전혀 하지 못했다. 할머니, 아버지 곁을 떠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남들처럼 친구들도 만나고, 영화도 보고…. 그런 게 아니더라도 반나절만이라도 평범하게 생활해 봤으면 좋겠어요.”

그러나 은정 씨는 절망하지 않는다. 오히려 장애아동을 돌보며 살고 싶었던 고교시절의 꿈을 반이라도 이뤘다며 웃었다.

“장애를 지닌 아버지, 할머니를 모시며 살고 있잖아요. 제 꿈의 반이라도 이뤘다고 할 수 있죠. 나중에 기회가 되면 어려운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기관에서 일하고 싶어요.”

“돌아가시기 전 유언 한 마디라도 들었으면”

은정 씨는 독실한 기독교인이다. 그러나 교회는 가지 못한다. 잠시도 집을 비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녀는 매주 일요일, 아버지 손을 꼬옥 잡고 기도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유언 한 마디라도 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 코가 아닌 입으로 밥 한 그릇이라도 지어서 드시게 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 할머니가 걸을 수 있도록 해주세요. 고모가…, 남동생이….”

지금껏 은정 씨는 자신을 위해서는 단 한 번도 기도하지 않았다. 기자는 인터뷰 말미에 “자신을 위해 기도한다면 무엇을 빌고 싶냐”고 물었다. 은정 씨는 수줍게 미소 지으며 “좋은 신랑 만나 행복하게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싶다”고 말했다.

김승훈 동아닷컴 기자 hun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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