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의 열기 속으로 30선]<6>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

  • 입력 2006년 5월 24일 03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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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야구를 몰랐다. 내 친구들도 아빠도 엄마도 몰랐다. 선생님조차 몰랐다. 할 수 없어서 국어사전에서 찾아보았다. “야구(사어·死語): 아주 옛날에 죽었기 때문에 잘 모른다. 긴 것으로 둥근 것을 치는 게임이라고도 전해지고 있다. 지면에 네모난 것을 놓고 악귀를 쫓았다.” 곧바로 나는 긴 것으로 둥근 것을 쳐 보았다. 아빠의 낚싯대로 2중 딤플로 된 골프공을…거 참 나는 이런 것을 재미있어 한 고대인의 심정을 알 수가 없다. ―본문 중에서》

그럴 걸로 짐작했다. 저자의 서문을 보니 자기 책이 스포츠 코너에 진열돼 있더란다. 리처드 브라우티건의 ‘미국의 송어낚시’가 레저 칸에, 김정환의 ‘황색 예수전’이 종교 코너를 장식하는 우리네 서점과 다를 바 없는 풍경이다. 그렇다면 이 ‘일본 야구’ 책을 소설 진열대로 보내고 손 털면 해결인가.

그게 글쎄…. 보르헤스의 ‘불한당 소설’이 걸작이라더라, 소문 듣고 페이지를 넘겼다가 경험하는 것과 같은 요령부득의 난감함이 우선한다. 소설이라니 그러려니 하겠지만 시종일관 맥락을 알 수 없는 말의 미로다. 그런데 전혀 우아하지도 감상적이지도, 더욱이 스포츠적이지도 않은 이 ‘소설’의 기존 독자 반응이 꽤 우호적이다.

1995년에 첫 번역이 나와 절판된 동안 ‘일본 야구’는 책 컬렉터들의 표적물이었다. 근래 이루어진 재출간의 동기도 바로 이 열광적인 독자 호응 때문으로 전해진다. 그 호평의 진실을 감히 유추해 보자면 그건 다카하시가 교묘히 던져 놓은 낚싯밥, 즉 ‘무언가 다른 것이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 아닐까.

굳이 줄거리를 찾아본다면, 야구라는 스포츠가 완전히 사라진 미래의 가상세계에서 야구 편집증을 가진 사람들이 야구의 의미를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확장시키는 이야기라고 할까. 다음은 등장인물 랜디의 발언. “그 탄생 이래 야구는 발전과 분화를 거듭하여, 미국 야구로부터 마다가스카르 야구, 그리고 우주 야구에 이르는 대략 9000개나 되는 아종을 낳아 온 것인데, 일본 야구만큼 우아하고 감상적인 것은 없었던 것 같다.”

다음은 ‘일본 야구 창세기담’ 편에 나오는 아들 네케레케세맛타의 말. “아버지, 우리들은 온갖 곳에 찾아가 ‘일본 야구’를 했습니다. 아버지, 당신은 삭제하겠습니다. 어머니, 당신은 취소하겠습니다. 맏형, 당신은 너무 복잡해. 그러니까 말소하겠습니다. 덩치 큰 형, 당신은 생략해 드리겠습니다. 막내 형, 당신은 교환당하고 싶습니까?”

소설은 근대의 산물이고 그 핵심은 서사성과 ‘나’로부터 출발하는 내면성의 구축에 있다. 다카하시의 천방지축 말놀이(PUN)는 그 점을 뒤집거나 패러디하는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의 전형이다. 야구를 이야기 축으로 등장시킨 것은 저자 자신이 경마광, 야구광이라는 우연도 작용했겠지만 무엇보다 육체성에 대한 정신성의 우위를 추구한 근대정신의 부정에 있을 것이다. 소설 속의 투수와 포수는 라이프니츠나 칸트의 어려운 저작물들을 대화 속에서 ‘가볍게’ 인용하거나 비틀며, 또 한편으로는 야구와 포르노 영화, 근친상간 등과도 연관관계를 만든다.

박민규의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은 야구소년 일대기로 시종하지만 그것은 실제의 야구에 인생 드라마를 포갠 정통적인 근대소설에 해당된다. 독자를 유혹하는 ‘무언가 다름’은 일본 야구 쪽이다. ‘포스트’ 현상이 심상한 일상이 된 오늘날 다카하시의 작품이 어떻게 읽힐지 자못 궁금하다.

김갑수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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