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박현모]한명회와 ‘재상’의 조건

  • 입력 2006년 3월 13일 03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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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에서 한명회만큼 오해를 받는 인물도 없는 듯하다. 그는 흔히 ‘세조의 장량(張良)’으로 불린다. ‘필부(匹夫)와도 같았던’ 수양대군에게 인재와 정보를 제공해 옥좌에 오르게 한 뛰어난 모사꾼이라는 것이다. 네 차례에 걸쳐 일등공신에 책봉되었고, 예종과 성종의 장인이 되어 ‘영화를 한 몸에 누린 사특한 권신(權臣)’이라는 부정적인 이미지까지 그에게 덧붙여져 있다.

놀라운 것은 그의 이채로운 말년이다. 한갓 궁궐지기였던 그가 세 임금을 모시며 영의정 등 고관 요직을 지냈지만, 탈가(脫駕·권좌에서 내려옴)할 때를 놓쳐 패몰하거나 죽음을 당한 대부분의 세도가들과는 다른 삶을 살았다. 73세의 나이로 그가 죽을 때 국왕은 음식을 들지 않고 슬퍼했다. 까다로운 사림들도 그를 함부로 폄훼하지 않았다. 도대체 비결이 뭘까?

첫째, 그는 말을 잘 듣고 잘 했다. 세종대왕은 정승의 핵심 요건으로 ‘공적’과 함께 ‘건백(建白)’을 들었다. 그 공적으로 보면 최윤덕이 영의정 감이지만, 말하는 것이 서툴러 우의정에 임명한다고 했다. 이 점에서 한명회는 정승의 요건을 갖췄다. 그의 타고난 친화력과 간명 직절한 말솜씨는 정적인 조번까지도 설득해 모든 사실을 털어놓게 했다. 그는 길게 말하는 법이 없었다. 수양대군도 말의 대의와 일의 실상에 대한 그의 간절한 설명을 듣고는 곧 오랜 친구처럼 대했다.

둘째, 정확한 판단력과 기획력이다. 그는 조번 등에게 들은 정보로 상대측의 움직임을 정확히 파악했고, 정적들의 거사 직전에 치밀한 선제공격으로 괴멸했다. ‘계유정난’ 때 그가 상중하의 시나리오를 만들고 수양대군에게 각각의 계책을 제시해 김종서의 수비망을 무너뜨린 것은 유명하다. 그는 김종서 등을 제거한 데서 그치지 않고 수양대군을 왕위에까지 오르도록 비전을 가지고 설득했다. 마치 장량이 함양 땅을 차지한 후 눌러앉으려는 한고조를 설득해 ‘졸부’가 아니라 ‘천하의 패자’가 되도록 만든 것처럼.

셋째, 나라를 위한 헌신적인 노력이다. 그는 권력을 얻는 데 뛰어난 ‘마상(馬上)의 정치가’일 뿐 아니라, 탁월한 ‘좌상(座上)의 행정가’였다. 그는 병조판서로서 새로운 방어전략을 세우는가 하면, 모두 가기를 꺼리는 북방지역에 몸소 나가 여진족으로부터 변방을 지켰다. 왕명을 받아 삼남 지방의 작황을 직접 조사해 농사를 망친 백성들에게 부당한 세금이 매겨지지 않도록 했다. 이 때문에 세조는 “한 공의 일처리가 이와 같으니 여러 사람 중에서도 으뜸”이라고 그를 칭찬했다.

한마디로 그는 단순한 모사꾼이 아니라 탁월한 정승이었다. 율곡의 표현대로 하자면, 나라만을 근심하고 자신을 돌아보지 않으며 시종 사직을 편안케 하는 데 정성을 다한 ‘충신’이었다(실제로 성종은 그에게 ‘충성·忠成’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런 한명회에게도 몇 차례의 위기가 있었다. 그중 최대의 위기는 ‘이시애의 난’이었다. 회령절제사 이시애가 반역을 모의하면서 신숙주, 한명회 등에게 통서(通書)했다는 자백이 나온 것이다. 세조로서는 그 자백을 받아들여 최고의 공신들을 제거할 수도, 그렇다고 ‘뭇사람의 입에 구실감이 된’ 이 문제를 덮어 둘 수도 없었다.

끈질긴 언관들의 탄핵 국면 속에서 세조가 내린 결론은 중용이었다. 먼저 한명회의 사퇴의사를 받아들여 삭탈관직 후 유폐하는 조치를 내렸다. ‘원근의 의혹을 불러일으킨 죄’를 처벌한 것이다. 그 다음, 세조는 그들을 다시 복귀시켜 정국을 안정시켰다. 언관들의 말을 받아들이되 국가의 일도 폐하지 않게 한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한명회의 자진 사퇴다. 세조의 부담을 덜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물러나는 그런 태도로 인해 그의 말년이 편안해졌다. 이해찬 국무총리가 새겨 보아야 할 대목이다.

박현모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원·한국정치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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