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들을 위한 책 20선]<18>낭만적 사랑과 사회

  • 입력 2006년 3월 11일 03시 0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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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팬티! 삼 년 동안 줄기차게 입어 온, 양은솥에 넣고 푹푹 삶아댄, 누리끼리하게 변색된, 낡은 팬티! 팬티를 사수하는 것은 세상을 사수하는 것이다.(‘낭만적 사랑과 사회’)

어디에 있든 나는 점점 더 강해지고 아름다워질 겁니다. 운명이 주는 어떤 시련에도 굴복하지 않겠어요. 그러니 내 두서없는 진술을 듣고 있는 당신. 당신도 부디, 어디서든 살아남으시고, 언제나 행복하세요. 진정한 행복이란 결국 마음먹기 나름이랍니다.(‘순수’)―본문 중에서》

한 권의 소설책이 갖는 섹시함이란 무엇일까? 어떤 책들은 일독만으로도 세상을 낯설게 한다. 드라마 속 여주인공의 액세서리나 의상이 시청자들의 기호를 선도하듯이 때론 소설의 밑줄 하나가 독자를 움직이게 한다. 움직인 만큼 일상은 진부한 습관으로 변질되고 안이한 긍정은 의문과 대질하게 된다. 낯익은 습관이 구역질나는 관습으로 전복된다면, 그래서 선정(煽情)이 선동(煽動)으로 확장될 수 있다면 그것이 곧 소설의 에로스가 아닐까? 정이현의 첫 번째 소설집 ‘낭만적 사랑과 사회’는 이러한 점에서 가장 섹시한 동시대 소설이라 칭할 만하다.

“나는 레이스가 달린 팬티는 입지 않는다.”

표제작이기도 ‘낭만적 사랑과 사회’는 이 야릇한 선언으로 시작된다. 도대체 왜 팬티이고, 왜 레이스일까? 팬티는, 일부일처제와 자본주의로 운용되는 현실에서 가장 손쉽게 택할 수 있는 계층 이동의 수단이다. 팬티가 수단일 수 있다는 것은 그녀가 자신의 처녀성을 거래의 매개로 선택했음을 뜻한다. 그래서 그녀는 학벌을 검열해 남자를 만나고, 재산을 가늠해 친구를 사귄다. 하나뿐인 처녀성은 학벌, 집안, 경제 사정, 전망과 같은 치밀한 세부 지표 검색하에 이루어질 거래를 위한 희유한 보유 재산으로 책정된다. 단 하나의 매물을 소중히 간수하느라 전전긍긍하는 그녀는 마침내 첫날밤 순결해 보이는 십계명까지 작성하기에 이른다. 목적은 순결이 아니라 ‘순결해 보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얼핏 보기에 매우 허구적으로 보이는 이 인물은 실상 현실 속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여성들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여성상이야말로 사회적 시스템과 억압 속에서 훈육되고 양성된 결과라는 사실이다. 낭만적 사랑이라는 핑계야말로 육체의 거래를 종용하는 시스템의 알리바이 아니었던가? 소설집 ‘낭만적 사랑과 사회’의 놀라운 점은 바로 이 부분이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모두가 모르는 척해 왔던 세속적 욕망의 지형도를 그려내, 일상이라는 미명 아래 은닉된 권력의 음모를 폭로해 낸다.

소설집 ‘낭만적 사랑과 사회’에 등장하는 여자들은 하나같이 출세 지향적이며 잔혹하고 이기적이다. 문제는 그녀들의 잔혹성을 배양하는 토대 자체가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질서라는 점이다. 10대의 옷을 벗겨 사진을 찍는 어른들(‘소녀시대’), 방탕한 애인과 순결한 아내를 원하는 남편(‘순수’), 성공을 빌미로 여성의 젊음을 착취하고자 하는 상사들(‘트렁크’)이 있기에 그녀들은 나빠진다. 그녀들은 단지 남자들이 가하는 폭력을 반동으로 이용해 시스템을 내파한다.

순응하듯 위장함으로써 질서의 내부를 교란하는 정이현의 태도는 아이로니컬하다. 남자들이 쳐 놓은 덫을 역이용해 그들을 농락하는 여성 인물들은 이 갑갑한 질서가 포획할 수 없는 섹시한 여성이다. 그러니 그녀들을 악녀라고 부르지 말라. ‘순수’라는 제목이 암시하듯 그녀들은 그저 주어진 환경과 여건을 ‘순수’하게 활용할 뿐이니까.

강유정 시인·영화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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