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천광암]쓰레기 왕자와 구정물 공주

  • 입력 2006년 1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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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 속 궁전 같은 외관에 높이 솟은 망루, 극채색의 현란함까지….

‘저 아름다운 두 건축물의 정체는 뭘까.’

서부 일본 최고를 자랑하는 오사카(大阪) 월드트레이드센터(WTC) 55층 전망대에서 멀리 매립 섬 마이시마(舞洲)를 내려다보면 누구나 이런 궁금증에 빠진다. 공장, 창고, 자동차하치장, 공사장, 넓은 운동장과 빈터로 이어지는 살풍경한 곳이기에 두 건축물의 색다른 모습은 더욱 빛을 발한다.

WTC에서 마이시마까지는 쉽지 않은 길이다. 전철을 3번 갈아타고 사쿠라시마(櫻島)라는 한적한 역에 내리면 섬으로 향하는 버스를 탈 수 있다. 버스는 30분에 한 대꼴, 승객은 많아야 서너 명이다.

‘괜한 걸음을 했나’ 하는 불안감은 버스가 섬으로 통하는 아치형 다리를 넘어서는 순간 감탄으로 바뀐다. 초현실주의 회화 작품에서 본 듯한 창문에 기둥 하나, 타일 한 장까지 예사롭지 않다. 그것을 예술품이라고 느꼈다면 제대로 본 것이다. 두 건축물의 설계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오스트리아의 건축예술가다.

놀라운 것은 예술품의 정체. 다리 왼쪽에 보이는 것은 쓰레기처리공장, 오른쪽은 하수처리공장이다. 쓰레기공장이 609억 엔, 구정물공장이 800억 엔짜리다. 한국 돈으로는 도합 1조2000억 원. 여기 쓰레기공장과 하루 처리용량이 비슷한 서울 강남쓰레기소각장이 1010억 원짜리라니 그 사치란….

쓰레기 호강시키느라 오사카 시민이 1인당 낸 돈은 2만4000엔, 구정물 호사시키느라 부담한 돈은 3만 엔이다. 오사카 시가 최대주주인 WTC는 2003년 3월 말 실질가치로 1000억 엔짜리 빚 덩어리라고 한다. 이러니 오사카 시가 빚더미에 올라앉지 않았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 2003년 오사카 시 채무는 1990년보다 2배 이상 많은 5조4762억 엔으로 불어났다. 시민 1인당 210만7224엔꼴이다.

오사카 시만 빚더미에 짓눌려 있는 게 아니다. 중앙정부도 마찬가지다. 올해 일본 정부 예산을 월소득 300만 원인 일반 가정 살림살이에 비유해 보자. 우선 지출액 가운데 71만 원은 빚을 갚는 데 쓴다. 가용 생활비는 229만 원에 불과하다. 수입은 더 심각하다. 정상적인 소득, 즉 세금 등으로 정부가 거둬들일 수 있는 돈은 고작 187만 원. 나머지 113만 원은 다시 빚을 내야 한다. 한마디로 빚내서 빚 갚기 바쁜 살림이다.

세계 2위 경제대국의 나라살림이 이 지경으로 나빠진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이를 설명하는 경제이론은 많다. 저마다 일리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이미 생활 속에서 체득하고 있는 ‘피와 물의 경제학’보다 더 핵심을 짚어 내지는 못한다. 세상에서 물 쓰듯 쓸 수 있는 돈은 딱 한 종류, 남의 돈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일촌(一寸) 사이인 아버지 돈도 남의 돈이다. 지독한 구두쇠 재벌 아버지 밑에서도 사치와 낭비로 가산을 탕진하는 2세가 나오는 것은 그런 이치다. 아무리 억만금을 갖고 있다 해도 ‘피 같은 내 돈’은 10원 한 푼까지 아끼는 법이다. 일본 공무원들에게 국민이 낸 세금을 ‘피 같은 내 돈’처럼 생각하는 ‘혈세(血稅) 의식’이 조금만 있었더라면 회생 불능의 돌려막기 살림은 면했을 터다.

WTC에서 마이시마를 볼 때 문득 머릿속을 스쳐간 말 두 마디가 있다. 하나는 “언론과 국회가 혈세라는 표현을 자주 써 세금에 부정적 인식을 심어 준다”는 이용섭 대통령혁신관리수석비서관의 주장, 다른 하나는 “선진국과 비교해 한국의 재정 규모를 (늘리는 쪽으로) 재검토해야 한다”는 한덕수 경제부총리의 발언이었다. 백성을 빚쟁이로 만들어 쓰레기 왕자와 구정물 공주를 위해 호화로운 성(城)을 쌓아 올리려는 전주곡이 아니기를 간절히 바랄 따름이다.

천광암 도쿄 특파원 i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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