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캘린더]시한부 아내와 3개월, 그리고… ‘바다와 양산’

  • 입력 2004년 9월 16일 17시 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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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M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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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치병을 앓던 아내를 저세상으로 떠나보낸 뒤 장지에서 집으로 돌아온 남편.

지친 표정으로 혼자 밥상을 차려 묵묵히 저녁을 먹는다. 문득 고개를 들어 쳐다본 창밖으로 펄펄 내리는 눈. 남편은 엉겁결에 아내가 누워 있던 안방을 향해 말한다.

“…이봐, 눈 내린다.”

순간, 남편은 더 이상 아내가 없음을 깨닫고 다시 고개를 숙인 채 밥을 삼킨다….

‘일상의 힘’이라는 주제를 상징적으로 함축하고 있는 연극 ‘바다와 양산’(연출 송선호)의 마지막 장면이다. 이 연극은 사소한 일상을 켜켜이 쌓아가다가 마지막에 문득, 사소함이 만들어 낸 무게를 묵직하게 얹는 작품이다.

작품 속에서는 발톱 깎는 모습같이 소소한 생활이 사실적으로 표현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고단한 삶의 구체적인 단면들이 생략돼 주인공 부부의 삶이 담백하게 묘사된다. 가령 가난한 소설가이자 야간 학교 선생인 남편과 아내가 겪는 생활고라든가 아내의 힘든 투병 과정은 생략된다.

남편과 출판사 원고 담당 여직원의 ‘관계’ 역시 은근히 암시될 뿐이다. 아내는 원고를 받으러 온 출판사의 새 남자 직원이 남편을 ‘선생님’이라고 호칭하자 “그 사람은 (당신을) 준모씨라고 했는데…”라는 말로 남편과 예전 출판사 여직원과의 관계를 이미 눈치 채고 있었음을 담담히 드러낸다.

‘시한부 인생을 사는 아내와의 마지막 3개월’을 그린 이 작품은 자칫 신파로 흐를 수 있는 주제지만, 살고 싶어 몸부림치는 절규 한마디, 눈물 한 방울 없이 담백하게 흐른다.

일본 작가 마쓰다 마사타카(松田正隆)의 작품을 번안한 국내 초연작. 중견 배우 남명렬 예수정씨가 각각 주인공 남편과 아내 역을 맡아 여백 있는 연기를 보여줬다.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로 정 많은 이웃집 아저씨를 연기한 박지일씨는 단조로울 수 있는 흐름에 적절히 웃음을 끌어내며 조연 이상의 역할을 해냈다.

대학로 아룽구지 극장에서 26일까지. 화∼금 7시반, 토 일 4시반 7시반. 1만5000∼2만원. 02-744-0300

강수진기자 sjk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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