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학]‘확장된 표현형’…이기적 유전자, 환경도 바꾼다

  • 입력 2004년 7월 30일 17시 1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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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의 몸에 침투해 숙주인 게를 생화학적으로 거세해 ‘암컷’으로 만든 뒤 자신의 알을 돌보도록 한다는 조개삿갓이 게 껍질에 붙어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게의 몸에 침투해 숙주인 게를 생화학적으로 거세해 ‘암컷’으로 만든 뒤 자신의 알을 돌보도록 한다는 조개삿갓이 게 껍질에 붙어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확장된 표현형/리처드 도킨스 지음 홍영남 옮김/553쪽 1만9000원 을유문화사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기돈 크레머가 무대 위에서 바흐의 ‘G선상의 아리아’를 연주한다. 애절한 선율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연주회장은 쥐죽은 듯 조용하다. 그런데 어떤 방청객이 몸을 비틀고 입을 틀어쥔다. 결국 참지 못하고 마른기침을 연방 해댄다. 모든 시선이 그에게로 모이고 연주회는 그것으로 끝나버린다. 그 주인공은 언제나 바로 나다. 이것이 내가 꾸는 악몽의 한 유형이다.

누구든 한번쯤은 참을 수 없는 기침 때문에 곤욕을 치른 일이 있을 것이다. 왜 기침을 통제할 수 없을까? 방귀처럼 단지 생리적인 반응일 뿐일까. 혹시 몸속에 침투한 감기 바이러스가 자신의 복제품을 더 많이 퍼뜨리기 위해 숙주인 우리로 하여금 기침을 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시도 때도 없이 말이다.

자신의 대표저서가 된 ‘이기적 유전자’에서 “인간은 유전자의 생존기계 혹은 운반자일 뿐”이라는 주장으로 우리를 당혹스럽게 했던 영국의 동물행동학자 도킨스가 이번엔 ‘확장된 표현형’이란 개념으로 우리를 또 한번 고민에 빠뜨린다. 유전자가 그 자신의 복제품을 더 많이 퍼뜨리기 위해 개체(운반자)를 고안했다는 주장도 혁명적 발상인데, 그는 한발 더 나아가 그 유전자가 자신의 목적을 위해 ‘다른’ 개체들마저도 자신의 운반자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고 주장한다. 너무 과한 주장 아닌가.

하지만 놀랍게도 이 확장된 표현형의 사례는 적지 않다. 그중에는 기상천외한 것도 있다. 예컨대 숙주인 게에 딱 달라붙어서 자기 자신을 단세포 상태로 변형시킨 다음 그 게 속에 잠입하는 조개삿갓의 경우를 보자. 기생자인 조개삿갓은 그 후엔 숙주인 게를 생화학적으로 거세해(만약 수컷이라면) 암컷화한 다음 숙주가 기생자인 자신의 알을 돌보도록 만든다. 기생자가 자신의 유전자를 더 많이 퍼뜨리기 위해 숙주에까지 마수를 뻗치는 광경이다. 숙주의 이 어이없는 행동은 음악회의 주책없는 기침처럼 기생 유전자의 확장된 표현형인 셈이다.

이보다 덜 극적이긴 하지만 친숙한 사례들도 있다. 가령, 날도래 유충은 개울 하류에서 잡다한 잔해들로 보금자리를 만들어 자신을 보호한다. 이는 마치 대합조개의 내용물이 그 조개껍데기에 의해 보호받는 것과 같다. 단지 그 보금자리가 날도래의 몸 일부가 아니라는 점에서 다를 뿐이다. 날도래 유충의 집은 이런 의미에서 확장된 표현형이다. 또한 비버는 강 속에서 안전하게 이동하려고 주위의 나무를 잘라 댐을 만드는데 도킨스는 이 비버의 댐도 확장된 표현형이라고 말한다. 이런 맥락에서 거미줄, 흰개미집, 새의 둥지와 같이 동물들이 만들어낸 인공물들도 모두 자신의 유전자를 더 효율적으로 퍼뜨리기 위한 확장된 표현형인 셈이다.

강물 속에서 안전하게 이동하기 위해 주위의 돌과 나뭇조각을 날라 댐을 만드는 비버. 동아일보 자료사진

사실, 우리는 개체가 집단을 위해 존재한다는 집단주의에도 거부감을 느끼지만 개체가 유전자의 통제를 받는다는 생각에도 불편하다. 문명을 만든 건 집단도 유전자도 아닌 우리 자신, 즉 개체라고 믿는다. 하지만 저자의 논리를 인간에까지 적용해 보면 우리의 문화와 문명도 결국 유전자의 확장된 표현형일 수 있다. 저자가 여기까지는 나아가지 않았다는 점이 다소 아쉽지만, 어쨌든 그는 이 책에서 ‘이기적 유전자’에서 못 다 한 전문적인 이야기를 통해 좀 더 분명하게 유전자의 눈높이로 내려왔다. 원제 ‘The Extended Phenotype’(1999년).

장대익 한국과학기술원 강사·과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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