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리뷰]‘취한 말들~’ 소년가장 힘겨운 세상 살아남기

  • 입력 2004년 7월 28일 18시 0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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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드족 소년 가장의 이야기를 센티멘털리즘에 빠지지 않으면서 가슴 저리게 담아낸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 -사진제공 백두대간
쿠르드족 소년 가장의 이야기를 센티멘털리즘에 빠지지 않으면서 가슴 저리게 담아낸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 -사진제공 백두대간
슬픔? 아픔? 측은함? 절망? 쓸쓸함? 외로움? 괴로움? 아니면, ‘나는 그래도 저보단 낫다’는 안도감? 이 영화를 보면서 관객이 흘리는 눈물은 아마 난생 처음 경험하는 종류일 것이다.

쿠르드족 출신 바흐만 고바디 감독이 만든 이란 영화 ‘취한 말(馬)들을 위한 시간’은 아바스 키아로스타미 혹은 마흐말바프 가족 같은 이란 감독들이 보여줬던 슬프면서도 유머러스한 정서와 다른 지점에 서 있다. 이 영화는 뭉클하기보다 가슴이 싸할 정도로 슬프며, 감동적인 게 아니라 불편할 정도로 아프며, 시(詩)적인 게 아니라 잔혹할 만큼 건조하다. 이 영화는 소년가장의 애절한 스토리를 넘어 이 세상에 살아남는다는 것의 고통, 그 자체를 말하기 때문이다.

이란과 이라크의 국경 마을인 바네. 12세 된 소년 아윱은 부모를 잃고 졸지에 가장이 된다. 아윱은 돈벌이에 나서지만, 왜소증에 걸린 동생 마디의 약값을 대기도 빠듯하다. 누나 로진은 마디를 수술시켜 달라는 조건으로 이라크로 팔려가다시피 시집을 간다. 하지만 신랑 어머니는 노새 한 마리로 신부 값을 치른 것으로 그만이다. 아윱은 노새를 팔아 마디의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밀수꾼들을 따라 이라크로 향한다. 국경을 넘던 아윱은 국경수비대의 추격을 받는다. 절체절명의 위기상황. 그러나 살인적 추위를 잊게 하기 위해 술을 먹인 노새는 취한 상태로 쓰러져 일어날 생각을 않는다. 아윱은 고삐를 당기며 울부짖는다.

이 영화는 감정을 응집시켰다가 확 터뜨리는 방식으로 클라이맥스를 만들지 않는다. 카메라는 아윱의 삶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지만, 마치 악마의 시선처럼 처절한 삶의 순간을 조목조목 차갑게 바라볼 뿐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노새에 봇짐처럼 실려 달랑달랑 흔들리는 마디를 보고 눈물을 참아내기는 힘들다.

전문 배우들이 아닌 실제 쿠르드족 아이들을 출연시킨 (왜소증에 걸린 마디와 이를 돌보는 여동생 아마네는 실제 친남매다) 점도 그렇거니와, ‘쌔∼앵’ ‘휘리릭’하는 국경의 매서운 바람소리는 영화적 리얼리티마저 뛰어넘으며 ‘제발 그만’이란 생각이 들 정도로 그들의 비참한 현실을 일깨워준다.

이 영화의 끝은 분명 불편하다. 술 취한 노새를 일으켜 세우려 안달하는 아윱의 모습에서 감독은 ‘동작 그만’을 외치며 무뚝뚝하게 영화를 끝내버린다. 이런 엔딩은 애틋한 여운 대신에 관객이 평생 가슴속에 무거운 덩어리를 간직하고 살아가게 만들려는 감독의 ‘지독한 배려’일 것이다.

제53회 칸영화제 황금카메라상 수상작. 키아로스타미의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주리라’에서 조연출을 맡았던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30일 서울 씨네큐브에서 개봉된다. 전체 관람 가.

이승재기자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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