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미군 차출]韓美협의 아닌 사실상 일방통보

  • 입력 2004년 5월 18일 18시 5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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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좋은 친구다(We are good friends).”

2003년 1월 16일 당시 노무현(盧武鉉) 대통령당선자는 서울 용산의 한미연합군 사령부를 방문해 이렇게 적었다. 그러나 지난 1년여간 한미동맹의 재조정 과정을 거치면서 한미는 ‘좋은 친구’라고 하기엔 어색할 정도로 ‘사무적’ 관계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양국의 입장이 직설적으로 오가고 부딪칠 뿐 다양한 갈등과 의견차를 협의하고 조정하는 ‘버퍼존(완충지대)’의 기능을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는 지적이 많다.

▽일방통행식 한미간 ‘협의’=이번 주한미군의 이라크 차출 결정은 ‘버퍼존 약화 현상’을 분명히 보여준다. 한국 정부는 “미국이 주한미군 차출을 ‘요청’했고, 한미간에 ‘협의’한 뒤, 한국측이 ‘이해와 동의’를 표했다”고 말하지만, 실질적으론 미국의 일방적 통보였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미국이 자국의 필요에 의해, 자국 군대를 차출한다는데 우리가 어떤 다른 의견을 낼 수 있느냐”고 말했다.

정부는 “그동안 미국의 외국 주둔 군대 중 주한미군 2사단에서만 차출이 없었다”며 이번 결정의 불가피성을 설명하고 있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한반도 안보가 그만큼 중요했음을 입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주미 한국 대사관의 국방무관 출신인 한나라당의 황진하(黃辰夏) 당선자는 “한미간에 서로 섭섭한 감정이 쌓이고 관계가 소홀해지면서 ‘솔직한 대화’는 사라지고, ‘공식 입장’만 오고 가는 상황이다”고 말했다.

심지연(沈之淵) 경남대 교수는 “과거에 주한미군이 감축될 땐 실무자급, 장관급, 정상급 협의가 차례로 있었다”며 “이번처럼 감축이 급작스럽게 이뤄진 적이 없다”고 말했다.

▽외교적 수사(修辭)만의 ‘윈윈 게임’?=참여정부와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말로는 ‘북 치고, 장구 치는’ 호흡을 보였다.

한국에서 ‘불균등한 한미동맹의 재조정’ 논의를 꺼내면 미국측은 “그런 맥락에서 주한미군 재배치 문제를 논의하자”고 대꾸했다. 한국의 ‘10년 내 자주국방’ 구상이 나오자 미측은 곧바로 “한국은 세계 12위 경제국가인 만큼 그래야 한다”고 맞장구를 쳤다.

한국측 발언은 ‘대미 불평등성 해소’를 주장하는 국내 여론이 비교적 많이 반영된 것이었고, 미측은 그런 발언을 자신들의 전략 구상에 적절히 활용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여권의 한 핵심관계자는 “해외주둔 미군의 구조조정 차원에서 ‘주한미군 감축’ 방안을 고려해온 미국으로선 한국의 ‘자주국방론’ 같은 것은 ‘울고 싶은 데 뺨 때려 주는 격’이었다”고 말했다.

한미관계가 결정적으로 어긋나기 시작한 계기는 지난해 가을 한국 정부 내의 이라크 추가 파병 논란이었다. ‘9·11테러’ 이후 ‘반테러전 동참’ 여부를 동맹 파트너십의 핵심 개념으로 삼아온 미국으로선 한국의 지지부진한 태도에 적지 않게 실망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도널드 럼즈펠드 미 국방장관은 지난해 11월 방한 중에 “한국이 추가 파병을 해야 하는 이유는 미국이 50년 전 (6·25전쟁에) 젊은이들을 한국에 파병했던 것과 똑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서울의 한 외교소식통은 “참여정부 이후 ‘외교부 주류 교체’ 차원에서 역대 미국통 상당수를 좌천시킨 것도 한미간의 버퍼존 약화를 촉진시켰다”고 지적했다.

부형권기자 bookum90@donga.com

이명건기자 gun43@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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