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만나는 시]유하, “그 빈 자리”

  • 입력 2004년 5월 9일 17시 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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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빈 자리

- 유하

미류나무 앙상한 가지 끝

방울새 한 마리 앉았다 날아갑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바로 그 자리

방울새 한 마리 앉았다 날아갑니다

문득 방울새 앉았던 빈 자리가

우주의 전부를 밝힐 듯

눈부시게 환합니다

실은, 지극한 떨림으로 누군가를 기다려온

미류나무 가지의 마음과

단 한 번 내려앉을 그 지극함의 자리를 찾아

전 생애의 숲을 날아온 방울새의 마음이

한데 포개져

저물지 않는 한낮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도 미세한 떨림을 가진

미류나무 가지 하나 있어

어느 흐린 날, 그대 홀연히 앉았다 날아갔습니다

그대 앉았던 빈 자리

이제 기다림도 슬픔도 없습니다

다만 명상처럼 환하고 환할 뿐입니다

먼 훗날 내 몸 사라진 뒤에도

그 빈 자리, 그대 앉았던 환한 기억으로

저 홀로 세상의 한낮을 이루겠지요

- 시집 ‘나의 사랑은 나비처럼 가벼웠다'(열림원) 중에서

내게도 ‘지극한 떨림으로 나를 기다려온’ 미루나무 가지 같은 누군가가 있었고 말고. ‘단 한 번 내려앉을 그 지극한 자리’를 찾아 온몸 설레며 포개지던 내 마음도 있었고 말고. 그런데 그 기억들 떠올리나니 왜 아득한 과거형으로만 불려오는 것일까. 언제부터 내가 앉은 이 미루나무, 너와 당신들의 떨림을 눈치 채지 못하게 된 걸까.

우리는 모두 이곳에 있으면 저곳에 없고, 저곳에 있으면 이곳에 없나니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우리가 무시로 내려앉는 ‘바로 그 자리, 바로 그 순간’마다 저 떨림과 설렘들 되찾을 수 있다면. 앉았다 떠난 자리마다 환한 기억들을 남길 수 있다면. 아니, 나 스스로 두 팔 벌려 누군가의 미루나무가 될 수 있다면.

반칠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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