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포커스]부인사망 딛고 일상되찾는 유창혁 바둑 9단

  • 입력 2004년 4월 11일 19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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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창혁 9단은 “아내를 잃은 아픔이 크지만 아직 승부를 포기할 때는 아니다”며 “체력이 받쳐 주는 50세까지는 치열한 승부를 하겠다”고 말했다.   -변영욱기자
유창혁 9단은 “아내를 잃은 아픔이 크지만 아직 승부를 포기할 때는 아니다”며 “체력이 받쳐 주는 50세까지는 치열한 승부를 하겠다”고 말했다. -변영욱기자
“여보, 나 옆방에서 큰애 재우고 잘게.”

유창혁 9단(38)이 2월 29일 오전 1시반 부인 김태희씨에게서 들은 생전 마지막 인사였다. 그날 아침 그는 방 안에서 싸늘한 시신으로 변한 부인을 발견했다.

1984년 입단해 화려한 기풍을 선보이며 정상급 기사로 활약해 온 유 9단이 기사생활 20년 만에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다. 부인의 죽음은 평소 ‘잉꼬 부부’로 소문난 그에게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충격이었다. 더구나 둘째 아이를 조산(早産)한 지 한 달 만이었다.

유 9단은 최근 제자들을 가르치는 데 제법 많은 시간을 쓴다. 함께 연구실을 쓰는 최규병 9단은 “원래 책임감이 강한 기사지만 부인이 간 뒤 더욱 애정을 쏟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달 맥심배 결승전이 열리던 날에도 오전엔 자기 공부 대신 제자들을 지도했다.

부인이 숨진 뒤 그의 전적은 한번의 기권패를 포함해 3승8패. 주변에선 ‘유 9단 정도의 기재(棋才)니 3승이라도 건진 것’이라고 말한다. 지난달 28일엔 맥심배 결승3번기 마지막 대국에서 루이나이웨이 9단에게 져 타이틀을 놓쳤다.

“진 것보다 바둑 내용이 형편없어 부끄럽습니다. 머리가 멍해서 집중이 안 돼요.”

그는 씁쓸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도 대국이 자주 있어 다행이란다. 그만큼 바쁘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바빠야 괴로운 현실을 잊을 수 있지요. 위로도 많이 받다 보니 지치더군요.”

유 9단은 ‘세계 제1의 공격수’라는 별명처럼 발군의 공격력이 돋보이는 기사. 그의 바둑은 고급스럽고 유연한 발상으로 ‘승부 위주의 바둑계에 예술과 품격을 도입했다’고 평가받는다. 세계대회(잉창치배, LG배 세계기왕전, 삼성화재배, 후지쓰배, 춘란배)에서 모두 우승하는 그랜드슬램을 가장 먼저 달성하기도 했다. 통산 우승 횟수는 24번.

굳이 말하자면 그는 홈런타자다. 천성적으로 낙관파인 탓에 어이없는 헛스윙 삼진도 종종 당하지만 한번 터졌다 하면 걷잡을 수 없이 홈런을 쏟아낸다. 바둑팬들은 이번 사건으로 그의 장쾌한 홈런을 보지 못할까 안타까워한다.

유 9단의 부인은 활달한 성격으로 유 9단의 후배 기사들이 많이 따랐다. 무뚝뚝하기로 이름난 돌부처 이창호 9단도 그를 ‘누나’라고 부를 정도로 가깝게 지냈다.

“도무지 현실감이 없어요. 큰 병에 걸려 숨졌다면 현실로 받아들이겠지만 지금도 어디선가 불쑥 나타날 것만 같습니다.”

그는 일부 매체가 부인의 죽음을 ‘의문사’처럼 몰고 간 데 대해 가슴 아파했다. 그는 2월 29일 오전 1시반경까지 부인과 함께 TV영화를 봤다. 다음 날 친가 식구들과 시골로 바람 쐬러 가기로 한 터라 부인은 “내일 당신이 운전해야 하니 피곤하지 않게 내가 큰 아이 재우고 다른 방에서 자겠다”고 했다. 다음 날 일어나 보니 부인은 옆방에서 문을 잠그고 자고 있었다. 오랜만에 단잠을 자는가 싶어 그냥 내버려뒀다. 점심 무렵 장모와 처제가 찾아왔기에 다시 문을 두드렸지만 반응이 없었다. 문을 따고 들어가 보니 일이 벌어져 있었던 것.

“불면증이 있던 아내는 가끔 술을 조금 마시고 잠을 청하곤 했는데 그날도 그랬던 모양입니다. 그날 왜 순순히 따로 자도록 했는지….”

평소 빈혈에 시달렸지만 전날도 혼자서 병원에 있는 아이를 위해 수유를 하고 온 터라 방심했던 게 화근이었다는 것이다.

“우울증 얘기는 제가 경찰에서 ‘집사람이 산후에 불면증이 심해져 상담소를 찾았더니 우울증을 조심해야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진술했는데 그게 부풀려진 것 같습니다.”

‘뽀뽀’를 자주 해주는 것으로 사랑을 표시했다는 그는 다정다감한 남편이었다. 부인은 한 인터뷰에서 “유 9단이 제 남편이어서 행복해요”라고 말했다. 자기 종교는 ‘창혁교(敎)’라면서.

15개월 된 큰 아들 동훈이는 평소 한번도 병원신세를 지지 않았지만 최근 감기 몸살로 두 번이나 병원 신세를 졌다. 두 아이는 곧 수유동 유 9단의 본가로 옮길 예정이다.

그는 요즘 간단히 술을 한잔해야 잠이 온다. 그래도 새벽에 잠이 깨면 좀처럼 잠들지 못한다. 그도 불면증 환자가 된 것. 그는 12일 일본에서 열리는 후지쓰배 16강전에 나선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정신 차려야 아내를 위한 도리겠지요.”

서정보기자 suhchoi@donga.com

●유창혁 9단은

▽1966년 서울 생

▽1984년 세계아마바둑선수권대회 준우승, 입단

▽1988년 대왕전 우승

▽1992년 왕위전 우승(이 해부터 4연패)

▽1993년 후지쓰배 우승

▽1996년 잉창치배 우승

▽1999년 후지쓰배 우승, 아나운서 김태희씨와 결혼

▽2000년 삼성화재배 우승

▽2001년 춘란배 우승

▽2002년 LG배 세계기왕전 우승(그랜드슬램 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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