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계 숨은주역]<9>역사학자 이이화씨 부인 김영희씨

  • 입력 2004년 3월 12일 18시 4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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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치울 마을의 오솔길을 산책하는 김영희씨. 김씨는 남편 이이화씨에 대해 “역사학자로서는 존경하지만 남편으로는 다시 만나고 싶지 않다”고 평했다. 남편은 “아들 딸 낳고 잘 사는데 부질없는 얘기”라며 아내의 말을 웃음으로 넘겼다.    -구리=권주훈기자
아치울 마을의 오솔길을 산책하는 김영희씨. 김씨는 남편 이이화씨에 대해 “역사학자로서는 존경하지만 남편으로는 다시 만나고 싶지 않다”고 평했다. 남편은 “아들 딸 낳고 잘 사는데 부질없는 얘기”라며 아내의 말을 웃음으로 넘겼다. -구리=권주훈기자
최근 발족한 ‘고구려 역사문화재단’의 공동대표인 이이화씨(67)는 오랫동안 우리나라 민중의 생활사를 복원해내는데 심혈을 기울여온 저명한 재야 사학자다. 특히 한 사람이 쓴 한국통사로는 최대규모인 ‘한국사이야기’(22권)를 다음달 출간할 예정이다. 이 책을 집필해온 10년여 동안 이씨 못지않게 고생한 사람은 다름 아닌 부인 김영희씨(55)다.

이들 부부의 관계는 “넌 마누라 없으면 거지될 놈이다”는 이씨 지인(知人)들의 말로 짐작할 수 있다. 1976년 국립극장 지하 다방 ‘카니발’에서 민족문화추진위원회 국역실장이던 이씨와 서울지방국세청 인사계 7급 직원 김씨를 맺어준 사람은 윤구병 전 충북대 철학과 교수였다.

“당시 남편 월급이 공무원의 두 배가 넘었고 연구직이어서 오래 일할 수 있겠구나 싶었지요. 한 마디로 직업을 보고 결혼한 건데, 글쎄 신혼여행 다녀와서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사표를 내 깜짝 놀랐지 뭐예요.”

이씨는 1977년 서울대 규장각 소장도서 해제위원, 1981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민족문화대백과사전 편찬팀으로 옮겨 다니며 하고 싶은 일들을 하고 살았다. 1982년부터는 “전두환 밑에서 일하기 싫다”며 정문연을 그만두고 경기 구리시 아치울 마을로 이사와 연구와 집필에만 몰두해왔다.

“집에 쌀이 떨어지지 않을 정도만 강연하고 글을 써요. 배부르면 글이 안 써진다고요.”

나머지는 모두 김씨의 몫이었다. 원고를 출판사로 갖다 주거나 우편으로 부치는 일, 원고료를 받아오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한문 실력이 뛰어난 이씨 집에는 한문을 배우러 오는 손님들이 끊이지 않았다. 김씨는 하루에도 10여 명씩 들이닥치는 손님들에게 밥상과 술상을 번갈아 내왔다.

“주민등록증 갱신하면서 지문 찍는 일 말고는 영감이 하는 일이 없어요. 옷도 제가 양복집에 헌 양복 가져다 맞춰 입혀줘야 한다니까요.”

생활력 없는 남편 곁에 아내의 마음을 붙들어둔 것은 무엇일까.

“학자로서 남편을 인정하거든요. 그런데 저 양반은 술이 한 잔 들어가야 진면목이 나오지요. 온몸에 에너지가 넘치고 생각이 자유로울 때 토해내는 이야기가 진짜 역사학자 이이화의 이야기예요.”

이진영기자 ecolee@donga.com

▼이이화씨가 보는 ‘나의 아내’▼

이이화씨는 마흔이 다 돼 결혼했다. ‘술 먹고 내뱉는 재치 있는 소리에 따르는 여자들은 많았지만 공부하느라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 그의 설명.

“어느 날 윤구병 교수가 그러더군요. ‘형의 글을 좋아하는 독자인데, 형한테 도움이 될 여자다’라고요. 만나보니 인상도 좋고 책을 많이 읽어 똑똑하고….”

이씨는 결혼 후 손님 접대를 좋아하는 아내의 성품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고 했다. “밥상 술상 차려다 나르면서 힘들었을 텐데도 아내는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이야기하는 것을 즐겼지요. 정말 대단한 여자예요.”

이씨는 “아내에 대한 고마움에 대해 할 말이 너무 많다. 그래서 못 한다”고 겸연쩍게 웃었다.

이진영기자 eco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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