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賞]<8>최양숙, 전래동화로 미국 童心 사로잡아

  • 입력 2004년 2월 22일 19시 1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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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미국 뉴욕의 한 초등학교를 찾아 학생들에게 동화 창작 과정을 설명하고 있는 동화작가 최양숙씨. 그는 ‘한국적 전통과 미국 이민자의 정서를 잘 표현하며 컬러가 강하고 따뜻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뉴욕=홍권희특파원
20일 미국 뉴욕의 한 초등학교를 찾아 학생들에게 동화 창작 과정을 설명하고 있는 동화작가 최양숙씨. 그는 ‘한국적 전통과 미국 이민자의 정서를 잘 표현하며 컬러가 강하고 따뜻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뉴욕=홍권희특파원
20일 오전 미국 뉴욕의 사립학교인 세인트 힐다 앤드 세인트 휴 스쿨. 도서관에 딸린 작은 교실로 3학년 두 학급 학생 34명이 들어와 카펫 바닥에 자리를 잡았다. 이날 ‘저자(著者) 되기’ 시간의 초빙강사는 뉴욕에서 활동하는 동화작가 최양숙씨(37).

최씨는 “이름 때문에 어릴 적 ‘양재기’라는 별명이 붙어 속이 상했다”는 일화를 소개하며 “그런 경험을 살려 한국에서 미국에 온 은혜라는 아이가 영어 이름을 정하는 문제로 고민하는 내용의 동화를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최씨의 동화 ‘내 이름이 담긴 병(The Name Jar)’을 이미 읽고 온 학생들은 최씨가 이야기 줄거리와 그림을 여러 번 고쳐 가며 책을 쓴 과정을 자료로 보여주자 “멋있다”를 연발했다.

“뉴욕의 빌딩 숲 사이를 걸어가면서도 미시시피의 과수원 길이나 악어와 토끼 같은 동화의 소재들을 떠올리고 어릴 적 읽은 한국의 옛날이야기들을 현대적으로 재구성해 본다”는 최씨. 매년 2종의 동화를 만드는 데 주력하느라 한눈 팔 시간이 없다면서도 어린 독자들은 자주 만나려 한다. 연간 20여 차례 학교 또는 서점의 사인회, 강연회 등의 초청에 응한다.

최씨는 1997년 미국에서 동화작가로 데뷔한 이래 7년간 10종의 책을 냈다. 그중 ‘해님 달님’은 ‘호랑이를 피해 도망치던 오누이가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을 타고 올라가 해와 달이 되었다’는 한국 전래동화를 미국 감각에 맞춰 번안한 작품이다. 뉴욕에서 두부공장을 운영하는 한국 이민자 김씨가 주인공인 ‘새 고양이’, 한국에서 한글 번역본이 출판된 ‘내 이름…’을 포함해 3종의 글과 그림은 모두 그의 작품이다. 나머지 7종은 일러스트레이션만 했다.

‘내 이름…’은 지금까지 약 5만권이 팔렸다. 1만권 이상 팔리면 성공적이라는 업계의 평가에 비춰보면 상당한 히트작이다. 시카고 공립도서관 선정 최우수도서가 되는 등 세 곳의 기관에서 우수도서로 추천된 덕분이기도 하다. 이 책은 또 올해 캘리포니아 아동도서상 후보에 올라 있다.

한국에서 가정학과를 졸업하고 항공사의 스튜어디스로 1년 반 근무한 뒤 디자인을 공부하기 위해 미국 유학길에 오른 최씨가 동화작가로 자리 잡은 과정은 다분히 극적이다. 그의 데뷔에는 체코 출신으로 뉴욕에서 활동하는 유명한 동화작가 피터 시스(55)의 추천이 큰 효과를 발휘했다. 1995년 뉴욕의 시각미술대학원인 스쿨 오브 비주얼 아츠에 다니던 최씨는 인디펜던트 스터디(전문가에게 사사하며 학점을 받도록 한 제도) 과정에 따라 시스씨에게 지도를 받고 있었다.

“학교 과제물로 한국의 전래동화 ‘해님 달님’을 소재로 한 동화그림 20컷을 그렸습니다. 시스씨는 ‘컬러가 강하고 따뜻하다’고 칭찬하면서 유력 출판사의 에디터들을 소개해줬어요. 출판사 5곳에서 그림원고를 받아보고는 ‘아주 드라마틱하다’면서 ‘당장 사겠다’고 하더군요. 그중 크노프(knopf)라는 출판사가 적극적이어서 8000달러에 원고를 넘겼죠. 출판사측과 협의해 원고를 약간 수정했고 데뷔작인 첫 동화책은 1997년 서점에 깔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부터 3, 4년간은 더 좋은 동화를 쓰기 위해 주말도 없이 일에만 매달렸죠.”

‘미국 동화출판의 전설적인 에디터’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FSG의 프랜시스 포스터와 함께 한 최양숙씨. -사진제공 최양숙

시스씨는 문예작품 전문출판으로 유명한 파라 스트라우스 앤드 지루(FSG)의 시니어 에디터인 프랜시스 포스터(73·여)에게 최씨를 적극 추천했다. 포스터씨는 동화출판 경력 50년의 전설적인 인물로 FSG에서는 그의 이름을 브랜드로 한 출판 자회사 ‘프랜시스 포스터 북스’를 설립해 그에게 발행인을 맡기고 있을 정도다.

FSG는 당초 최씨의 ‘해님 달님’ 원고를 마음에 들어 했다가 “스토리가 미국에서 이해될지 모르겠다”며 포기했었다. 최씨가 일감을 거듭 요청하자 포스터씨는 최씨의 실력을 다시 평가해 보기 위해 중국계 미국 작가 밀리 리의 원고를 건네면서 “우선 스케치만 해보라”고 주문했다. 이런 경우 출판사측은 그림작가에게 적은 액수일지라도 수고료를 주지만 이번은 최씨가 시험 삼아 해보는 것이었기 때문에 급여도 없었다.

최씨는 밤샘작업 끝에 일주일 만에 32쪽의 동화책에 들어갈 20컷의 스케치를 완성했다. 포스터씨는 “글이 표현하려는 정서와 딱 들어맞는다. 분위기를 잘 파악했다”고 반기면서 즉석에서 정식 계약을 했다. 이 그림들은 다음해 ‘님과 전쟁 노력’이라는 동화책으로 세상에 나왔고 최씨의 활동무대를 더욱 넓혀주었다. 이 책은 국제도서협회 우수도서상과 캘리포니아 아동도서상을 받았고 미국도서관협회 우수도서, 뉴욕타임스 우수도서로 각각 선정되는 낭보를 낳았다.

포스터씨는 이 작업을 계기로 최씨의 재능을 인정해 내년에 나올 창작동화 ‘복숭아 천국’을 포함해 모두 6종의 작품을 최씨에게 맡겼다. 딸에게 귀국을 종용하는 최씨 부모에게 포스터씨는 “앞으로 몇 년간 뉴욕에서 더 활동하는 것이 그의 세계를 넓혀 줄 것”이라는 편지를 쓰기도 했다. 또 최씨가 미국 영주권을 신청할 때에는 미 이민당국에 이런 추천서를 보냈다.

“최양숙씨는 독특한 재능과 섬세한 터치로 동화출판에 공헌하고 있다. 최씨는 훌륭한 영어 구사력과 한국적 문화배경을 갖고 있고 미국의 이민 경험을 잘 이해하고 있다. 이런 작가를 찾기는 굉장히 힘들다. 최씨와 함께 더 많은 책을 만들기를 원하는 사람은 나뿐이 아니다.”

최씨는 동화 원고를 멋진 영어로 쓰느라 애쓰지 않는다. 문법이나 표현이 틀리면 에디터가 다 고쳐준다. 이보다는 자신만의 아이디어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최씨는 또 “그림 실력은 훈련을 통해 키울 수 있지만 동화작가로서 더 중요한 것은 어린이 정서”라고 강조한다. 어른이 어린이를 위해 쓰는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 있는 어린이’와 이야기하듯 해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뉴욕=홍권희특파원 konihong@donga.com

●최양숙씨는

△1967년 서울 생

△1989년 상명대 졸(가정교육과)

△1993년 미국 미시간 켄달 칼리지 2년 수학(일러스트레이션과)

△1995년 뉴욕 스쿨 오브 비주얼 아츠 졸업(석사)

△1997년 첫 동화 ‘해님 달님’, 이어 ‘님과 전쟁 노력’ 발간

△1997년 ‘가장 뛰어난 동화 아티스트’ 중 한 명으로 선정(퍼블리셔 위클리)

△1999년 국제도서협회(IRA) 우수도서상 수상

△2000년 캘리포니아 아동도서상 수상

△2001년 동화 ‘내 이름이 담긴 병’ 발간(한글 번역본 2003년 발간)

△2005년 11번째 동화 ‘복숭아 천국’ 발간 예정

△2006년 동화 ‘비하인드 더 마스크’ ‘랜디드’ 발간 예정

▼경쟁치열한 美동화책 시장

97년 최양숙씨가 미국에서 펴낸 첫 동화 ‘해님 달님’의 표지. 우리의 전래동화를 미국 감각에 맞춰 번안한 작품이다.

미국에선 픽처북(그림동화), 아동도서 및 교재용 도서 등을 포함해 매년 5000종의 어린이책이 쏟아져 나온다. 뉴욕 공립도서관이 매년 발표하는 100종에 들면 성공작으로 1만부는 너끈히 팔린다.

활발한 아동도서 출판사만 100개 이상. 기성작가에 작가 지망생까지 합하면 경쟁이 엄청나다. 출판사의 시니어 에디터(편집간부)나 아트 디렉터(미술감독)가 원고에 관심을 가져준다면 그것만으로도 작가적 소질을 인정받는 셈. 유명 출판사의 리셉션 데스크에는 주인이 찾아가기를 기다리는 원고뭉치와 그림샘플이 늘 수북이 쌓여 있다. ‘동화작가로 데뷔하기도 쉽지 않지만 막상 데뷔하면 더 힘들어진다’는 말이 이래서 나왔다.

에디터들은 ‘내용이 좋은 것’이나 ‘정답형’보다는 ‘새로운 것’을 찾는다. ‘신데렐라’에서는 남자가 여자에게 결혼하자고 했지만 요즘은 ‘뮬란’에서처럼 여자가 전쟁에 나가고 남자를 선택한다는 식이다.

여러 에디터들과의 대화나 독자 반응을 종합해서 최양숙씨가 정리해낸 요즘 트렌드는 △어린이들에게 독립성과 능동성을 길러주고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것이어야 하며 △유머가 있고 △독자들의 기억에 오래 남는 캐릭터가 있어야 한다는 점. 또 상대적으로 책을 덜 읽는 남자아이, 편부모나 이혼한 부모 아래서 자라는 아이, 입양아,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아이 등을 소재로 한 동화가 독자층에 파고들기 유리하다고 최씨는 지적한다.

그림동화는 24∼48쪽으로 표준형은 32쪽이고 20개가량의 그림이 들어간다. 글은 500단어가 보통이며 2000단어가 넘는 경우도 있다. 한국에서는 급하면 몇 달 만에 동화책을 만들어내기도 하지만 미국에선 글과 그림 원고를 출판사에 넘기고 나서 1년 뒤에야 책이 나온다. 어린 독자들은 홍보자료나 독서지도교사의 소개를 듣고 몇 달 전부터 책이 나오기를 기다린다.

뉴욕=홍권희특파원 koni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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