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만이 살길이다]<9>정부가 진정 해야 할 일은

  • 입력 2004년 1월 13일 17시 3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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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증권 방영민(方泳敏) 전략기획담당 상무는 지난해 말 잘 나가던 재정경제부 과장에서 민간인으로 변신한 초년병 임원이다.

방 상무는 “기업에 와보니 공무원이 할 수 없고, 해서는 안 될 일이 너무나 많다는 점을 실감하게 됐다”고 털어놨다.

한국의 경제시스템은 ‘글로벌 스탠더드’도 ‘아시아 스탠더드’도 아닌 ‘관료 스탠더드’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정부의 파워는 막강하다. 경제의 중심축이 빠른 속도로 민간으로 옮아가고 있는 데 비해 정부 역할의 변화 속도는 여기에 미치지 못한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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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적 평등주의’의 덫에 빠진 규제

스와프 옵션 등 파생상품은 최근 기법이 더욱 발달돼 유가증권이나 통화뿐 아니라 현물(現物)이나 신용을 기초로 한 것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 최신 장외(場外) 파생상품들에 대해서는 어느 국내 증권회사들도 손대지 못하고 있다. 정부가 아직 허가를 해주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상품을 취급할 수 있는 기업이 있는데 역량이 모자라는 기업을 기준으로 규제하고 있는 것. 그렇다 보니 이 시장은 외국 금융회사들의 독무대가 되어 있다.

재경부의 한 관계자는 “솔직히 관청에 앉아 있는 공무원들이 눈부신 금융시장의 변화 속도를 따라가기는 어렵다”며 “허가권을 갖고 있는 일선 감독당국에서는 새 상품의 내용을 자세히 모르니 뒷감당이 겁나고, 그러니 ‘안 된다’는 말밖에 못하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키 맞추기 식의 규제가 지배하고 있는 한 한국 금융시장은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동북아 금융허브’는 헛구호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는 게 금융계의 공통된 지적이다.

이 같은 기계적 평등주의는 금융시장뿐 아니라 교육, 세제, 재정, 노사관계, 산업정책 등 모든 분야에 스며들어 한국 경제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

좌승희(左承喜) 한국경제연구원장은 “관치(官治) 평등화정책 밑에서 붕어빵 기업, 획일적 학생들만 나와서는 경제와 사회의 역동성이 살아날 수 없다”며 “채권자, 주주, 투자자, 소비자들이 좋은 기업과 망할 기업을 구별하는 ‘시장에 의한 차별화’가 우리가 가야 할 길”이라고 강조했다.

○어처구니없는 규제도 많아

서비스업에 대한 규제는 전방위적이다. 한국의 전체 국내총생산(GDP)에서 서비스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2000년 현재 52.9%로 이미 절반을 넘는다. 하지만 서비스업에 대한 편견은 지독하고도 뿌리 깊다. ‘제조업=생산=좋은 것’ ‘서비스업=사치 향락 소비=나쁜 것’이라는 선입견이다.

이렇다 보니 온갖 차별적인 규제가 서비스업에 대한 투자를 가로막고 있다. 전기요금에서 세제, 금융 심지어 산재보험 요율까지 서비스업이라는 이유만으로 더 비싸게 물어야 한다.

박병원(朴炳元) 재경부 차관보는 “정부 안에서조차 제조업 중심의 고정관념을 깨기가 쉽지 않다”며 “서비스업의 올바른 발전 없이는 제조업의 경쟁력도 담보할 수 없고 투자와 일자리도 늘어날 수 없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라고 강조했다.

○정부 노력에 따라 투자환경 달라져 지난해 11월 9일 경기도청 2층 회의실에서는 흐뭇한 광경이 벌어졌다. 경기도지사, 농심 사장, 일본 스미토모 계열사인 동우화인캠 사장이한자리에 모여 용지교환협정을 맺은 것. 스미토모의 5억달러 한국 내 투자가 사실상 성사되는 순간이었다.

스미토모가 대규모 투자를 통해 액정표시장치(LCD) 부품을 생산하는 동우화인캠 공장을 증설하고 싶다는 의향을 밝힌 것은 지난해 7월. 하지만 기존 공장과 붙어 있는 부지 4만5000평은 이미 농심이 소유하고 있었다.

경기도는 손학규(孫鶴圭) 지사가 직접 나서고 실무자들이 수십 번 농심 관계자들을 찾아가 “공단 안에 있는 똑같은 면적을 내줄테니 이미 갖고 있는 땅은 스미토모에 양보해 달라”고 끈질기게 설득했고 농심이 흔쾌히 받아들였다.

지자체가 적극적인 의지를 갖고 외국인 투자를 성사시킨 대표적인 사례다.

이재율(李在律) 경기도 투자진흥관은 “중앙이나 지방 정부의 노력에 따라 국내외 기업들의 투자환경이 훨씬 좋아질 수 있다”고 말했다.

○원칙이 없으면 투자도 어려워

소비자가 관중인 시장에서 기업이 선수라면 정부는 심판이다. 심판은 게임이 공정하게 운영되도록 규칙을 만들고 철저하게 지켜야 한다. 그래야 선수들이 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열심히 실력을 기르고 뛴다.

조동철(曺東徹) 한국개발연구원(KDI) 거시팀장은 “정부가 어느 한 편에 법이나 규칙에 없는 양보를 요구하면 정부 스스로 정한 법과 원칙이 무너진다”며 “이처럼 신뢰가 없는 곳에서는 활발한 투자도 기대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경제의 중심축이 정부에서 기업으로 넘어오면서 전반적으로 정부가 손 떼야 할 부분들이 강조되는 분위기다. 하지만 기업활동과 국가 전체의 경제발전을 자극하기 위해 정부의 적극적인 역할이 필요한 부분도 많다.

개별 기업이 나설 수 없는 나라 전체의 인프라 구축이다. 여기에는 도로 공항 항구 고속철도 같은 사회간접자본(SOC)도 있고, 국가적 차원의 연구개발(R&D) 지원도 포함된다. 기술지식은 공공재이며 사회적 인프라이기 때문이다.

기업, 대학, 연구소 등 산학연과 공공 부문을 유기적으로 연결해 각자의 경쟁력은 물론 국가적 경쟁력을 높이는 산업클러스터를 기획하고 조정하는 역할도 유능한 정부의 조건이다.

또 장기적인 국가 전략 아래 미래 성장동력산업을 지원하는 일도 긍정적인 역할이다. 다만 이런 국가 지원사업들이 과거의 사례처럼 ‘예산 나눠먹기’ 식으로 진행되는 것은 경계해야 할 부분이다.


김광현기자 kkh@donga.com

이은우기자 lib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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