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를 다시 보자]<1>북한의 고분벽화…덕흥리(하)

입력 2004-01-12 17:43수정 2009-10-10 0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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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흥리 고분 앞칸 북쪽 벽 왼쪽에 그려진 묘의 주인공 유주자사 진. -사진제공 이태호 교수
《평양에서 서해안의 진남포로 평야지대를 가로질러 포장도로를 신바람 나게 달렸다. 서해갑문과 남포지역 공업단지를 트럭들이 오가는 산업도로였다. 한 시간 남짓 달려 북쪽 길로 접어드니 병풍처럼 이어진 산 능선을 배경으로 대안(大安)시 무학산(舞鶴山)이 우뚝 앞을 가로막는다. 학이 춤추는 형상이다. 먼 선사시대부터 이곳의 강변을 일구고 살았던 사람들도 신령스럽게 여겼을 터이다.》

무학산 주변에는 많은 고구려 벽화고분이 산재해 있다. 현재 90여기의 벽화고분 중 60여기가 평양 주변에 있는데 40기가량이 무학산 일대에 집중돼 있다. 덕흥리(德興里), 대안리, 약수리, 태성리 등의 벽화고분이 산언저리를 끼고 있고, 강서대묘와 중묘가 산의 서쪽 구릉지에 자리 잡고 있다.

강서를 지나 용강군에는 용강대총과 쌍영총이 유명하다. 대동강 건너 남쪽 황해남도 안악지방에서는 안악1·2·3호분과 복사리 벽화고분이 발견된 바 있다. 이들 가운데 무덤 주인의 이름과 조성시기가 밝혀진 안악3호분(357년)과 덕흥리 벽화고분이 주목을 끌었다.

덕흥리 고분 안칸에서 앞칸으로 나가는 통로 오른쪽 그림을 필자가 직접 찍은 사진. 묘의 주인공인 유주자사의 행차를 알리는 듯 두 기병이 호령하고 있다. -사진제공 이태호 교수

●광개토대왕, 중국 랴오둥 지방에 고구려 관리 파견 증명

덕흥리 고분은 1976년 8월에 발굴되었다. 유주자사(幽州刺史) 진(鎭)이 77세 때인 ‘영락 18년(408)’에 숨졌다는 내용을 포함해 벽화 장면마다 먹으로 글을 써 놓고 있어, 광복 후 우리 고고학의 큰 성과로 꼽힌다. 고분의 문자 기록은 고구려에서는 드문 예로 벽화에 대한 도상(圖上)해석을 가능케 해 준다.

‘영락(永樂)’은 광개토대왕 시절의 고구려 연호이다. ‘유주’는 랴오둥(遼東)지방이고, ‘자사’는 지방장관으로 지금의 도지사 격이다. 이미 5세기 초 고구려가 랴오둥을 지배해 지방관을 파견했음을 알려주는 고분이다.

덕흥리 벽화고분은 무학산 기슭의 남쪽 자락 솔밭 언덕에 오롯하게 썼다. 반지하에 조성한 묘실은 통로가 낮아 허리를 잔뜩 굽히고 들어서야 했다. 벽화의 상태는 양호했고, 앞칸과 안칸 두 개의 방에 고구려 사람들이 가득 차 있다. 1600년 동안 벽화 속에 갇혔던 고구려 사람들이 나를 향해 마구 뛰쳐나오는 것 같다.

무덤 주인인 ‘진’은 부채를 들고 마치 부처님이나 도사처럼 평상에 앉아 계신다. 그 앞에는 음식을 차릴 석상(石床)이 놓여 있다. 앞칸이 제사를 지낸 공간임을 말해 준다.

초상화의 서쪽 벽으로는 유주에 속한 13개 고을의 수령인 태수들이 자사를 향해 상하로 도열해 있다. 남벽에는 유주자사와 관리들의 회의 장면도 보인다. 동벽은 질서 정연한 행렬도이다. 이들 모두 유주자사의 공적인 관청(官廳) 생활 장면이다.

궁륭(穹륭,)식으로 좁힌 앞칸의 천장에도 벽화가 빼곡하다. 천장 밑부분에는 산악과 사냥하는 사람들이 보이고, 그 위로는 신선들과 동물들이 배열되어 있다. 고구려인의 내세관을 반영한 그림이다. 비천과 신선, 사람 얼굴을 한 네발동물이나 조류, 머리가 둘인 새, 날개 달린 잉어 등 장수와 부귀를 나타내는 영물(靈物)들은 해 달 별과 함께 고구려 사람들의 하늘신앙을 읽게 해 준다.

앞칸과 안칸의 통로 부분은 유리로 막지 못해 회벽의 벽화 상태를 그대로 드러냈다. 회벽은 단단했고 벽화 수법을 정밀히 살필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림은 묘 주인이 저택에서 관아로 이동하는 행차인 모양이다. 소가 끄는 두 대의 수레를 호위하는 기마병과 시녀들이 상하로 각각 그려져 있다. 특히 선도 기마병을 보면 “쉬이, 물렀거라, 자사 납신다” 하고 외치는 표정에 자못 해학미가 흐른다. 단숨에 그린 붉은색과 먹의 선묘는 빠른 붓질이 느껴진다.

●리얼리즘 화풍으로 드러나는 고구려만의 특성

시신을 모시는 안칸의 벽화는 무덤 주인의 사적인 가정 생활상으로 채워져 있다. 약 3×3m 넓이의 정방형 안칸에 들어서면 바로 맞은편으로 거대한 차일이 쳐진 안에 앞칸과 같은 자세의 유주자사 진의 초상화가 있다. 그런데 의아스럽게도 부인의 자리가 비어 있다.

이 오른편으로는 소가 끄는 수레 상하로 긴 저고리의 주름치마를 입은 양갈래머리의 소녀와 높은머리로 올려 묶은 여인들이 보인다. 또 말을 타고 활을 쏘아 과녁을 맞히는 마사희(馬射戱) 장면, 불교의 칠보행사, 연꽃이 활짝 핀 연못, 2층 누각의 창고가 사방에 빙 둘러 배치되어 있다.

안칸의 천장은 네 벽면 모서리에 기둥과 목조건물의 뼈대와 불꽃무늬 등을 그려 넣어 앞칸에 비해 단순한 구성을 보여준다. 마치 목조건물의 집안에 들어앉은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벽화는 관 속의 죽은 자가 생전의 생활상을 편안히 관망하도록 꾸민 것 같다. 무덤은 혼백이 살아남아 안주하는 성스러운 거처인 셈이다.

이렇게 4∼6세기 고구려인은 자신들의 삶과 명예를 무덤 안에 재현해 놓았다. 더욱이 중국의 그 시절과는 완연히 다른 화풍(畵風)으로 고구려의 사회상을 보여준다.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벽화들이 누구도 왜곡할 수 없는 우리 고구려의 살아 있는 역사를 증언해 주고 있지 않은가. 당대의 현실과 이상을 담은 고구려 고분벽화는 진정 리얼리즘 예술의 승리이다.

이태호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

▼“덕흥리 벽화는 회벽화… 강서대묘-중묘는 석벽화”▼

덕흥리 고분 앞에 선 필자(왼쪽)와 북한 안내원. 고분 너머 봉긋하게 솟아 있는 것이 무학산이다. -사진제공 이태호 교수

고구려 고분벽화는 크게 회벽화(灰壁畵)와 석벽화(石壁畵) 두 가지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주로 많이 활용된 기법이 회면화법이다. 벽돌이나 잡석, 또는 다듬은 돌로 묘실을 쌓고 석회를 발라 편평한 화면을 만든 다음 그 위에 그림을 그리는 방식이다. 일종의 프레스코 기법으로 가장 보편적인 벽화법이다

덕흥리 벽화고분에서 확인한 대로 고구려는 석회 다루는 기술이 최고였다. 최근 고구려 회벽화의 분석에 따르면, 조선시대의 예보다 불순물이 적고 순도가 높은 석회 혼합기술을 가졌다고 한다. 그런 탓에 고구려의 회벽화는 회면이 떨어진 부분을 제외하면 변색이 적고 보존상태가 좋은 편이다.

석면화법은 강서대묘와 중묘의 벽화처럼 너른 판석이나 반듯하게 자른 돌로 묘실을 축조하고 돌 위에 직접 그리는 방식이다. 이는 기본적으로 양질의 화강암이 산출되는 지역이라야 가능한, 고구려의 독자적 방식이다.

석면에 안료가 적응함으로써 며칠 전에 그린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이고, 무덤 내부의 장엄 효과도 높다. 석벽화는 회면화법보다 후대에 유행한 기법으로 고구려 후기 경제력이나 문화적 진보의 결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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