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나바시 요이치 칼럼]‘9·11과 11·9’

  • 입력 2003년 11월 20일 18시 4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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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9·11테러 직후 리처드 아미티지 미 국무부 부장관은 워싱턴에 체재 중이던 파키스탄 국방부의 고위 관리와 만나 당시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과 단교할 것을 강하게 요구했다. 파키스탄 관리가 “역사적인 인연도 있고 해서 곤란하다”고 머뭇대자 아미티지 부장관은 “역사는 지금 시작됐다”며 몰아붙였다.

미국은 ‘9·11은 모든 것을 바꿔 놓았다’는 이른바 ‘9·11 역사관’을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해 왔다. 미국이 주도한 테러와의 전쟁에서는 ‘친구 아니면 적’이라는 단순한 원칙이 세계 각국을 압박했다.

9·11은 테러리스트가 핵무기를 손에 넣으면 인류가 종말을 맞을 것이라는 공포를 미국과 세계에 안겨줬다. 동시에 미국의 만능 신화도 종지부를 찍었다.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이 갑자기 공포에 질린 약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9·11로 가장 많이 변한 것은 미국이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그들은 왜 미국을 미워하는가”라고 묻는다. 하지만 ‘그들’의 증오는 미국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공격해 체제를 전복시켰을 때 최고조에 달했다. 반미감정과 반미주의는 이제 이슬람권 밖으로도 확산되고 있다.

△미국에 좋은 인상을 갖고 있는 브라질 사람은 2000년 56%에서 2003년 35%로 감소 △그리스 사람의 87%가 ‘미국은 세계 평화에 대한 위협’이라고 응답 △러시아 사람의 45%는 사담 후세인이 미국에 더 저항하지 못한 것에 실망했다고 응답 △캐나다 사람의 70%가 ‘미국은 캐나다의 국익에 무관심’하다고 인식. 43%는 ‘캐나다는 미국으로부터 좀 더 독립해야 한다’고 응답.

반미주의의 배경은 복잡하지만 상당 부분 파워(Power), 폴리시(Policy), 퍼포먼스(Performance), 퍼스낼러티(Personali-ty)의 머리글자를 딴 ‘4P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다. 미국 일극(一極)구조의 하이퍼파워, 친이스라엘 노선의 중동정책, 유엔을 경시하는 일방주의적 태도, 텍사스 카우보이를 연상시키는 부시 대통령의 개성이 겹쳐 각국의 반미감정을 자극했다. 게다가 TV 뉴스와 인터넷, 세계화, 민주화의 물결이 반미감정을 증폭시켰다.

독일에서는 국민 과반수가 “대유럽연합(EU) 관계가 대미 관계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세계화가 진전되면서 유럽인은 오히려 자기 자신과 주변을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 것이다.

민주화를 이룬 한국에서는 젊은층을 중심으로 경제발전과 민주화 성과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다. 미국은 그들에게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원치 않는 존재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반미주의를 잉태한 최대 원흉은 다름 아닌 미국의 언동이다. 미국의 한 외교전문가는 “미국의 문제는 9·11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미국의 자만을 부른 출발점은 11·9였다”고 말했다.

‘11·9’는 독일 베를린장벽이 붕괴된 1989년 11월 9일을 뜻한다. 동서 냉전에서 승리했다는 미국의 자부심이 자만으로 이어졌고, 결국 지금과 같은 고립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그는 “미국 스스로 반성해야 할 시기가 다가왔지만 반성하는 움직임은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래도 미국 내에서 ‘모든 것이 9·11 탓만은 아니다’라는 현실 인식이 싹트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11·9가 모든 것을 바꿨고, 미국이 그런 흐름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바람에 9·11을 초래했다’는 자각이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동서 냉전체제가 종언을 고했던 당시, 어디서부터 잘못됐기에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살펴보자는 조용한 성찰의 움직임이 일고 있다. 9·11에서 11·9로 역사를 약간 되돌려 국제 정치의 ‘잃어버린 10년’을 성찰하려는 기운인 것이다.

제임스 스타인버그 브루킹스연구소 부소장은 “새로운 이라크를 건설하는 작업과 관련해 일본은 대미 지원이라는 틀에만 집착하지 말고 자신이 잘할 수 있는 분야에서 아이디어를 내야 한다”고 말했다.

일본도 미국을 돕기 위해 자위대를 파견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이라크 부흥 협력의 철학을 재정립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후나바시 요이치 일본 아사히신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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