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 세러피][영화]'케이-펙스'를 보고

  • 입력 2003년 10월 23일 17시 1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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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정신과 의사가 되어 처음 맞았던 환자는 P라는 젊은 여자였다. 그녀는 화가였는데, 우주로부터 빛의 형태로 된 기운이 내려와 영감을 전해 줌으로써 자신이 이 세상을 바꿀 위대한 작품을 만들게 될 것이라 믿었다. 그녀는 영감을 좀 더 온전히 받아들이기 위한 것이라며 옷을 다 벗어 던진 채 수백 개의 촛불을 켜고 여의도 공원에 서 있다가 강제로 병원에 끌려 들어왔다. 명백한 과대망상 증세였다.

그런데 문제는 그녀의 현실감이 조금씩 회복되어 가면서 시작되었다. ‘완전 초보’ 정신과 의사였던 나는, 도무지 어디까지가 과대망상이고 어디서부터가 예술적 창조성인지, 입원 전에 행했다던 파격적인 퍼포먼스들은 과연 정신병 증상이었는지, 아니면 그녀의 예술적 주관이었는지 심히 헷갈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녀가 아침에 병동에 나와 앉아 병실 창문으로 쏟아지는 햇빛에 대해 묘사해 줄 때면, 나도 모르게 그녀의 감성 넘치는 표현에 빨려 들어가며 함께 실눈을 뜨고 햇빛을 감상하곤 했다. 심지어 어떨 때는 그녀가 회복되면서 자유로운 감수성이 조금씩 억제되는 것 같아 아쉬운 마음까지 들었다.

●나도 스톡홀름 증후군?

지난달 국내에 개봉되고 이달 초 비디오로 나온 ‘케이-펙스(K-Pax)’는 자신이 머나먼 라이라 성좌의 ‘케이-펙스’라는 별에서 온 외계인이라고 주장하는 남자 프롯(케빈 스페이시)을 그린 영화다. 그는 지구의 햇빛이 ‘케이-펙스’의 광량보다 너무 높다며 늘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다니고, 사과며 바나나 같은 ‘지구 과일’들을 예찬하며, 외계어를 들려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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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당하기 어려운 비극에 직면했을 때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만들어낸 가상의 세계로 도피한다. ‘케이-펙스’는 그같은 망상으로 되레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묘하게 위로해 주는 판타지 영화다.동아일보 자료사진

프롯이 병실에 입원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변화를 가져오자 주변 환자들은 그가 진짜 외계에서 온 사람이라 믿기 시작하고, ‘케이-펙스’로 돌아갈 때 데려가 달라고 요청하게 된다. 그가 자신의 별로 돌아가겠다고 예고한 날 일어난 사건들을 보며, 나는 오래전의 P를 떠올렸다.

이 영화는 정신과 환자를 소재로 한 영화들이 갖는 몇 가지 상투적 오해들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마음을 끌었던 점이 있다면, 프롯을 치료하던 정신과 의사 마크의 심정이 P를 만났던 당시의 내 이야기와 닮았기 때문이다. 일상의 관계들이 피곤하고 버거웠던 그는 프롯의 진실을 밝혀낸 후에도 그가 진짜 외계인이라고 생각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정신의학에서는 현실과 다른 생각을 확고히 믿는 증상을 망상이라 한다. 지금은 뇌신경체계의 이상이 망상의 가장 큰 원인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이를 일으키는 심리적인 동인은 괴로운 현실을 부정해 버리고, 자신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바람이나 두려움을 외부에서 일어나는 일로 투사해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 결과 환자들은 실제 현실이 아닌 또 하나의 세계를 만들고 그 안에서 나오길 한사코 거부하게 된다.

주인공 프롯은 가족의 죽음과 관련된 일련의 사건들을 현실로 받아들여 해결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그는 마음속의 슬픔과 두려움과 분노, 심지어 자신의 존재와 이름도 부정해 버리고, ‘케이-펙스’라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그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케이-펙스’에서 아무도 가족을 이루지 않음을 강조하는 것도 “나는 가족을 잃어 슬프고 고통스럽다”는 마음을 부정하고 “거기서는 아무도 가족을 이루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바꾸어 믿음으로써 마음의 안정을 찾기 위한 절박한 시도인 것이다.

P의 경우 역시 그녀의 마음속에는 자기 재능에 대한 열등감과 좌절감이 뿌리 깊게 자리해 있었고, 우주의 영감을 받는다는 과대망상은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시도였음을 나중에야 알았다.

그런데 가끔, 우리가 망상이라 믿는 환자의 생각이 만약에 사실이라면, 하는 상상을 해 볼 때가 있다.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현실이란 얼마나 좁디좁은 것일까. 또 인식할 수 없는 세상에서는 얼마나 많은 일들이 일어나며, 심지어 사소한 일상에서조차 현실적인 입장을 유지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말이다.

더구나 마음이 복잡할 때는, ‘케이-펙스’ 같은 나만의 세계를 하나 마련해서 거기로 떠나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그럴 용기가 없으니, 차라리 지구별에 놀러 온 외계인의 눈으로 조금 낯설고 신기하게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을 배워 보면 어떨까 한다. 그건 일상이 무료하고 지겨울 때, 특히 거리마다 버글거리는 인파에 염증이 날 때, 아무 데서나 소리 높여 떠드는 사람들 때문에 심란할 때, 그리고 맛없는 음식을 먹어야 할 때 매우 유용할 것 같다.

유희정 <정신과 전문의· 경상대병원 정신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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