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전망대]권순활/'진보'라는 이름의 환상

  • 입력 2003년 9월 21일 17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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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란 말을 다시 생각해보는 일이 늘었다. 사전에서 찾아보면 ‘사물이 점차 발달하는 일. 사물이 차차 나아지는 일’로 설명돼 있다. 요즘 느끼는 고민은 우리 사회에서 흔히 말하는 진보가 실체적 의미에 얼마나 들어맞느냐는 점이다.

경제적 측면에서 보면 국민의 삶이 더 나아지고 국부(國富)가 커지는 것이 진정한 진보일 것이다. 문을 닫는 기업과 가게가 줄을 잇고 실업자가 거리를 메우고 개인과 나랏빚이 급증하는 사회를 이렇게 부르기는 어렵다.

노무현(盧武鉉) 정부는 개혁적, 진보적이라는 평을 듣고 출발했다. 청와대와 내각에는 이른바 ‘진보적 인사’가 대거 참여했다. 그런데 경제위기를 알리는 경보음은 계속 울리고 우리 삶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현 정권 주도세력은 선거에서는 프로였다. 나름대로 열정도 있어 보인다. 하지만 국정운영의 무게와 책임은 잘 모르는 것 같다.

특히 핵심인사 상당수가 ‘정상적 조직생활’과 근로소득세 납부의 경험이 거의 없다는 것이 국민을 불안케 한다. 조직과 세금의 의미를 알면 세상을 만만하게 보지 못한다. 하물며 ‘로또복권식 삶’은 기대하지도 않는다.

어쨌든 국민의 직접선거를 통해 들어선 정부다. 실패로 끝나면 모두의 불행이다. 어디서부터 풀어가야 할까.

이제라도 정부는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원칙에 충실해야 한다. 세계사적 조류에서 한물 간 이념이나 탁상행정에 집착하면 모두 망한다. 갈수록 추락하는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는 현실의 냉혹함과 절박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다시 쟁점으로 떠오른 출자총액제한제도만 해도 그렇다. 좋든 싫든 ‘강자(强者) 독식’의 글로벌경쟁은 이 시대의 특징이다. 국내 대기업을 적대시하면서 기를 쓰고 사전규제에 매달리는 것은 명분과 실익 모두 약하다. 기업친화적 정책과 규제완화, 전투적 노사문화의 개선이야말로 우리 시대에 요구되는 진정한 경제개혁과 진보가 아닐까.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 국가든 개인이든 빚더미가 쌓이면서도 잘 될 것이라고 착각하면 비극적 종말이 기다릴 뿐이다. 모든 청구서는 갚아야 하며 인기영합적 포퓰리즘의 달콤함 뒤에는 치명적 독(毒)이 숨어 있다.

과거 독재정권이라는 시대적 상황 때문에 좌파적 경제관은 제대로 검증을 거치지 않고 한국 지식인 사회를 풍미했다. 그러나 세상은 달라졌다. 특히 경제정책에서 더 이상 여기에 미련을 두는 한 우리 사회는 갈수록 힘들어질 것이다.

아무리 고매한 이상이라도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더 팍팍하게 만든다면 그것은 진보가 아니라 퇴영(退영)이다. 이제는 ‘진보라는 이름의 환상’에서 벗어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 한국호(號)의 재도약을 위한 전략을 세워야 할 때다.

우리 경제는 현재 중요한 갈림길에서 있다. 이대로 가면 ‘날개 없는 추락’의 가능성이 더 높다. 위기보다 더 무서운 것은 다가오는 위기를 읽지 못하거나, 알면서도 애써 외면하는 것이다.

“역사라는 기차가 굽잇길을 돌 때마다 지식인들은 차 밖으로 튕겨나간다.” 카를 마르크스의 경구(警句)는 그가 의도한 방향과는 다른 의미에서 지금 우리가 곱씹어볼 만하다.

권순활 경제부차장 shkw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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