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지배구조]<7>기관투자가 '주주 행동주의'

  • 입력 2003년 8월 17일 17시 2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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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지배구조가 좋을수록 주가가 오르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지배구조를 따지는 기관투자가가 늘어나고 있다. 이에 따라 지배구조 개선에 있어서 기관투자가의 역할도 날로 중시되는 추세. 2002년 LG전자가 국내외 기관투자가들을 상대로 기업 설명회(IR)를 하는 모습. LG그룹은 2003년 3월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했다.
기업지배구조가 좋을수록 주가가 오르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지배구조를 따지는 기관투자가가 늘어나고 있다. 이에 따라 지배구조 개선에 있어서 기관투자가의 역할도 날로 중시되는 추세. 2002년 LG전자가 국내외 기관투자가들을 상대로 기업 설명회(IR)를 하는 모습. LG그룹은 2003년 3월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했다.
지난해 휴렛팩커드(HP)와 컴팩컴퓨터가 합병한 것은 전 세계에 기관투자가의 영향력을 다시 한번 입증하는 계기가 됐다.

합병에 반대했던 창업주 휴렛가(家)와 합병을 추진했던 칼리 피오리나 HP 회장은 각기 주주들을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했다. 2002년 3월 HP의 주주총회에서 3% 차이로 피오리나가 이겼다. 휴렛가는 “주총 전 피오리나가 기관투자가인 도이체방크에 찬성표를 던지도록 압력을 행사했다”며 소송을 냈다.

법원은 이를 기각했지만 ‘도이체방크가 합병 여부를 결정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하지는 못했다.

‘기업 감시자’로서 미국 기관투자가의 역할은 의결권 행사에 그치지 않는다.

찬반 의사를 밝히는 소극적 역할 뿐 아니라 때로는 최고경영진도 퇴진시킨다. 투자기업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지배구조를 뜯어 고치는 것은 물론이다.

▽캘퍼스의 사례=미국의 ‘캘리포니아공무원연금’(캘퍼스·CalPERS)의 인터넷 홈페이지에는 특이한 항목이 있다. 지배구조가 불량한 회사의 명단(Focus list)을 올려놓은 것. 2003년에 선정된 회사는 제록스 미드웨이게임스 등 6개사. 캘퍼스는 지분구성, 지배구조의 문제, 캘퍼스의 요구사항, 그리고 해당사의 수용 명세 등을 상세히 안내한다. 이들 기업은 불명예는 물론 캘퍼스의 ‘팔자’ 공세도 감수해야 한다.


다음은 제록스에 대해 올려진 내용.

△보유주식수-300만주 △제록스의 주주로서 우려-가장 비효율적인 이사회, 미 증권거래위원회(SEC)로부터 벌금을 받았고 1997∼2000년 순익을 재보고하도록 요청받음…. △요구사항-3명의 독립적인 이사(director)를 새로 선임할 것, 임원진(Executive Committee)의 교체를 검토할 것, 이사회 의장과 CEO를 분리할 것… △제록스의 수용 명세-한 명의 신임 이사 선임….”

지배구조가 나쁜 회사에 대한 캘퍼스의 응징은 외교 문제로 비화되기도 했다.

1999년 캘퍼스가 지배구조가 나쁘다는 이유로 프랑스 대기업의 주식을 팔아 주가가 떨어지자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은 “미국 캘리포니아의 노인들이 프랑스 기업을 농락하고 있다”며 프랑스 국민들에게 주식을 사달라고 호소했다.

죄질이 나쁘면 소송도 불사한다.

지난달 캘퍼스는 “2001년 아메리카온라인(AOL)과 타임워너가 합병할 때 AOL이 광고매출을 최소한 17억달러 부풀려 투자자에게 손실을 안겼다”며 AOL타임워너를 고소했다.

이 같은 투자자의 노력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을 두고 ‘주주 행동주의’라 부른다.

▽국내의 변화 조짐=국내에서도 지난해부터 기관투자가에게 ‘시장감시자의 역할’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다. 시민단체가 주도해 온 ‘주주권 찾기’ 운동을 진정한 시장 참여자인 기관투자가가 넘겨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송명훈 기업지배구조개선지원센터 부원장은 “기업들은 싫으나 좋으나 시장에 코드를 맞추는 수밖에 없고 시장의 대변자는 바로 기관투자가”라고 말했다.

정부도 제도 마련에 나섰다. 2002년 관련법을 개정해 “기관투자가는 이사선임이나 합병 등 주요 경영 결정에는 의결권을 행사하고 공시하라”고 요구한 것. 과거에는 재벌 계열사인 기관투자가가 적은 지분으로 경영권을 누리는 오너를 옹호하고 있다며 의결권을 제한했다.

적극적으로 의결권을 행사하는 기관투자가도 하나 둘 나타나고 있다.

올해 초 삼성투신운용과 한국투신운용은 하이닉스반도체의 ‘21 대 1 균등 감자안(減資案)’에 대해 반대표를 던졌다. 한국투신은 또 대우조선해양의 재무제표 승인안에도 반대했다.

기관들이 모여 비공식적으로 세(勢)를 규합해 압력을 넣기도 한다. 미래에셋자산운용 손동식 운용본부장은 “투자회사가 부실 계열사를 지원하려고 하는 경우 몇 군데 기관이 함께 찾아가 그러지 말 것을 주문하는 일은 많다”며 “기업은 상당히 부담스러울 것”이라고 말했다.

도이체방크투신운용은 곧 국내 최초의 지배구조펀드를 출범할 예정이다. 적극적으로 지배구조를 개선하려는 의지가 가장 중요한 편입주식 선정기준. 지배구조가 개선되면 주가가 오른다는 믿음이 깔려 있다.

증권사 애널리스트의 역할도 크다. 불투명한 경영 결정을 내린 기업에 ‘팔자’ 의견을 내 기업을 압박하는 것. 지난해 기업분할한 풀무원도 애널리스트의 부정적 보고서와 기관들의 ‘팔자’ 공세에 밀려 “시장이 우려하는 어떤 불투명한 거래도 하지 않겠다”고 물러섰다.

▽한국, ‘반쯤 물이 찬 유리잔’=그러나 아직은 가야 할 길이 훨씬 멀다.

증권거래소에 따르면 2003년 3월 주총에서 기관의 찬성률은 95.45%에 이르렀다. ‘거수기’의 역할을 하는 데 그친 현실을 드러낸 것이다.

시장에선 국내의 단기투자 문화를 주요 걸림돌로 보고 있다. S투신운용의 한 펀드매니저는 “펀드의 수명이 1, 2년에 불과한데 투자자로서의 주인의식을 갖기는 어렵다”며 “자연히 기업의 지배구조를 고치는 것보다는 팔아 치우는 쪽을 택하게 된다”고 말했다. 펀드의 수명이 짧은 것은 펀드 투자자들이 장기투자자가 아니기 때문에 생기는 일.

장기투자할 수 있는 국민연금은 ‘정부 개입’이라는 오해를 낳을 수 있어 전면에 나서기를 꺼린다. 캘퍼스와 같은 역할을 하고 싶지만 국민적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보는 것.

많은 기관투자가가 기업으로부터 자금운용을 위탁받아 자유로운 의사결정이 어려운 점, 펀드의 영세성으로 지분이 낮다는 점도 문제다.

UBS워버그증권 리처드 새뮤얼슨 이사는 최근 열린 지배구조 세미나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국은 ‘물이 반만 찬 유리잔이다. 외환위기 이후 기업지배구조 개선에 대한 많은 노력과 인식의 변화가 있었다. 그렇지만 기관은 기업의 지배구조를 개선하는 데 기여하지 못하고 있다.”

이나연기자 larosa@donga.com

신석호기자 kyle@donga.com

▼전문가의 시각 ▼

기업지배구조의 개선이 기업가치와 기업실적을 올릴까? 지배구조 개선으로 기업가치가 제고된다면 왜 기업들은 스스로 지배구조를 개선시키려고 노력하지 않을까?

기업지배구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질문들이다.

실제로 국내외 학계와 증권업계에서는 이에 대한 답을 찾고자 활발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필자도 이 가운데 한 사람이다.

구체적 연구 결과를 하나씩 살펴보자.

1991∼1999년 미국의 상위 1500개 기업을 분석한 미국학계의 한 연구에 따르면 기업지배구조가 우수한 기업이 그렇지 못한 기업에 비해서 기업가치도 높고 주가수익률도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1999년에는 100점 만점의 기업지배구조지수가 10점 개선되는 경우 시가총액이 장부가자산의 27%나 높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지배구조가 낙후된 기업군을 매각하고 지배구조가 우수한 기업군을 매입하는 전략을 펼 경우 투자자의 주가수익률은 연평균 8.5%의 초과수익률을 얻은 것으로 나타났다.

크레디리요네(CLSA) 증권회사가 2001년 신흥시장 25개국 115개 기업을 분석한 연구에서도 결과는 비슷했다. 우리나라 상장회사를 분석한 연구도 유사한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2001년 한국증권거래소가 실시한 설문자료를 이용해 분석한 결과 100점 만점을 기준으로 기업지배구조지수가 10점 개선되면 시가총액은 장부가자산의 6.5% 상승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배구조지수 항목 중에서는 특히 사외이사 비중이 중요한 것으로 나타났으며 사외이사 비중이 50% 이상인 기업이 그렇지 못한 기업에 비해서 시가총액이 장부가자산의 16% 만큼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물론 주가를 설명하는 다른 변수들은 동일하다고 가정하고 나온 수치다.

이상의 연구 결과들을 종합해 볼 때 지배구조의 개선은 기업가치를 높인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왜 기업들은 기업가치 제고를 위해서 스스로 지배구조를 개선시키지 않는 것일까? 왜 오히려 정부의 지배구조 개선요구에 때로 강력하게 반발하는 것일까?

그것은 기업의 경영권을 장악하고 있는 지배주주 입장에서 볼 때 ‘지배구조 개선에 따른 주가상승이익’이 ‘낙후된 지배구조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사적(私的) 이익’보다 작기 때문일 것이다.

예컨대, 시가총액이 100억원인 어떤 회사에 30% 지분을 가진 지배주주가 있다고 해보자. 그리고 낙후된 지배구조 덕에 부당내부거래로 1억원에 해당하는 사적이익을 얻었다고 하자. 이 경우, 시가총액은 99억원으로 하락할 것이지만 지배주주의 주식평가손은 3000만원에 불과할 것이다.

필자의 연구 결과도 이 같은 논의를 뒷받침하고 있다. 국내 상장회사를 대상으로 기업지배구조의 결정요인들을 분석해 보았는데 자발적 요인의 영향력은 낮았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기업의 성장성이 높고 △외부에서 조달해야 할 자금이 많으며 △지배주주의 지분이 높은 기업은 지배구조가 좋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사외이사 비중 50% 이상’과 같은 강제조항(증권거래법)을 적용받는 기업(자산규모 2조원 이상의 공개기업)의 지배구조가 더 좋은 것으로 나타났다. 자발적인 지배구조 개선에는 한계가 있으며 정부나 시장 차원에서의 강제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김우찬·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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