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포석 人事의 세계]서울대교수 김광웅<上>

  • 입력 2003년 7월 1일 18시 2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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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년 5월 15일 스승의 날을 맞아 서울대 행정대학원 사제가 한자리에 모였다. 앞줄 가운데가 김광웅 교수, 김 교수 바로 뒤가 이강래 의원, 그 오른쪽으로 한사람 건너 하옥현 경찰대 교수부장.-동아일보 자료사진
99년 5월 15일 스승의 날을 맞아 서울대 행정대학원 사제가 한자리에 모였다. 앞줄 가운데가 김광웅 교수, 김 교수 바로 뒤가 이강래 의원, 그 오른쪽으로 한사람 건너 하옥현 경찰대 교수부장.-동아일보 자료사진
인사문제를 다루는 학문을 굳이 꼽으라면 행정학이라고 할 수 있다. 행정학과 정치학의 경계에 대해선 다툼이 없지 않지만 인사하면 행정학을 떠올리는 것이 보통이다. 중견 행정학자로 초대 중앙인사위원장을 지냈던 김광웅(金光雄·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의 인재 감별법은 어떤 것일까. 행정학자 특유의 인재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그가 전한 일화 한 토막.

1979년 말 서울대 행정대학원 석사논문 심사통과자 명단이 발표된 이 대학 게시판 앞. 평소 열심히 하기로 유명한 하옥현(河沃炫)씨가 논문 심사에서 떨어졌다는 소식에 교수와 학생들은 웅성거렸다. 하씨는 이미 박사과정 입학시험에 합격한 상태였으므로 석사논문이 통과되지 못하면 박사과정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논문 지도교수는 행정학계의 대부격인 박동서(朴東緖) 교수였는데 논문 통과에 반대한 이는 박 교수의 수제자인 김광웅 교수였다. 김 교수의 회고다.

“난들 왜 마음이 아프지 않았겠어요. 하지만 은사의 제자라고 해서 평가기준을 달리 적용하는 것은 서로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어요.”

하씨는 이를 악물고 석사논문을 새로 써서 이듬해 여름 오케이를 받았고, 이어 가을에는 행정고시까지 합격했다. 하씨는 총리실을 거쳐 지금은 경찰대 교수부장(경무관)으로 있다. 그는 틈틈이 공부를 계속해 98년 파리의 사회과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 준비과정 논문(DEA)도 통과했다. 2000년에는 경찰 사이버테러 대응센터 구축에 앞장서기도 했다. 김 교수의 엄격한 논문 심사가 그에겐 전화위복이 됐던 셈이다.

‘악연’일 수도 있었던 두 사람은 지금도 사제로서의 정리를 이어가고 있다. 설날이면 하 부장이 김 교수에게 세배를 가고 김 교수는 하 부장이 근무하는 곳이면 어디든 들러 격려한다. 김 교수는 하 부장이 회장을 맡고 있는 한불교류협회 고문직도 맡고 있다.

하 부장은 “당시 순간적으로는 서운함도 없지 않았고 자존심도 상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더욱 분발해서 부족한 것을 채워나갈 수 있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진정한 인재는 칭찬에 안주하지 않고 주어진 가혹한 상황을 성공의 밑거름으로 소화하는 사람”이라며 “당시 하 부장으로서는 내가 야속했겠지만 벼랑에서 떨어진 사자새끼 중 강한 놈만 살아남듯 남다른 사람들은 역경을 뛰어넘는다”고 말했다.

김 교수의 혹독함에 젊은 시절 눈물을 흘렸던 또 한사람은 민주당 이강래(李康來) 의원이다. 이 의원은 명지대 행정학과를 졸업한 뒤 80년대 중반 서울대 행정대학원에서 박사과정까지 마쳤다. 이 의원은 그러나 박사학위 논문 제출 자격시험을 치르던 날 지하철 노조의 파업으로 30분 정도 늦게 시험장에 도착했고 시간에 쫓긴 나머지 답안을 충분히 작성하지 못해 불합격된다. 합격선에서 불과 0.3점 모자라는 점수였다.

평소 이 의원의 성실성과 실력을 잘 아는 교수들은 그의 딱한 사정을 감안해 ‘배려’를 해주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러나 대학원장을 맡고 있던 김 교수는 “인정(人情)으로 예외를 인정해줄 수는 없다”고 거부, 결국 이 의원은 논문제출 자격을 얻지 못했다.

이 의원은 2년 뒤 박사과정 입학시험을 다시 치러야 했다. 이번엔 논문 지도교수를 김 교수가 직접 맡았다. 논문의 제목은 ‘북한 관료제의 연구’. 평가에 엄격하기로 소문난 김 교수지만 이 의원의 논문에 대해서는 “비교적 잘 쓴 논문이었다”고 회고했다. 이런 인연으로 김 교수는 대학원 졸업 후 이 의원의 든든한 후원자가 돼주었다.

2000년 총선 때는 동료 교수들과 함께 모금을 해 무소속으로 출마했던 이 의원을 도와주기도 했고, 바쁜 시간을 쪼개 전북 남원 지역구를 두 차례나 방문해 그를 격려하기도 했다. 지금도 이 의원의 후원회에는 반드시 참석한다. 김 교수의 말이다.

“우수한 소양에 자신의 앞길을 스스로 개척하는 집념과 투지를 갖춘 사람이라면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빛을 일궈내는 법입니다.”박성원기자 swpark@donga.com

▼김광웅 교수는 ▼

1941년 생. 이론과 실무를 겸비한 중견 행정학자. 서울대 법대를 나와 미국 하와이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미시간대 객원교수, UC버클리대 객원교수, 노스웨스턴대 초빙교수 등을 거쳤다. 행정학회 회장, 의회발전연구회 이사장도 지냈다.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의 당선자 시절인 98년 1월 정부조직개편위 실행위원장을 맡아 정부조직 개편 작업을 주도한 뒤 99년부터 2002년까지 초대 중앙인사위원장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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