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크엔드 포커스]“유방속에 묻은 ‘고통’ 꺼내주세요”

  • 입력 2003년 4월 10일 16시 4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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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 제거 및 재수술을 주로 하는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M성형외과 수술실.신석교기자 tjrry@donga.com.
실리콘 제거 및 재수술을 주로 하는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M성형외과 수술실.신석교기자 tjrry@donga.com.
낮 최고기온이 섭씨 20도를 오르내리는 요즘 성형외과를 찾는 여성들의 관심사 중 하나는 몸매다. 몸의 노출을 통해 일상복과 수영복의 맵시를 드러내는 시기가 다가오는 탓이다.

몸매에 자신이 없거나 몸매를 더 부각하고 싶은 여성들은 유방확대 수술을 받는다. 지금쯤 수술을 받아야 3∼4개월 뒤에 안심하고 물가를 거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거 유방확대 수술을 받았던 여성들이 유방확대용 실리콘 삽입물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는 경우가 최근 늘고 있다. 올해 1월 ‘인체에 유해하다’는 유방확대용 실리콘 백(bag)을 제조한 미국 다우코닝사를 상대로 한 피해배상 소송에서 한국여성 1200명이 총 3000만달러(약 370억원)의 배상금을 받게 된 뒤 벌어진 현상이다.

실리콘 삽입물이 인체에 해로운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쟁 중이다. 하지만 실리콘 백을 가슴 속에 지닌 여성들은 ‘충격과 공포’를 느끼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 통증과 고통

주부 A씨(45)는 2월 초 서울 압구정동 M성형외과를 찾았다. 1986년 서울 시내 한 성형외과에서 유방확대 수술을 받았다는 A씨의 오른쪽 유방 위쪽이 눈에 거슬릴 정도로 불룩하게 솟아 있었다. 실리콘 백이 자리를 잘못 잡은 것이다.

당시 수술 받은 지 한달이 채 안 돼 A씨의 오른쪽 유방은 딱딱하게 굳기 시작했다. 의학적 용어로 구축(삽입물 주위에 몸이 스스로 형성한 막이 딱딱해지는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지금은 보편적인 수술 후 마사지도 A씨는 받지 못했다. 몸속 실리콘 백의 기분 나쁜 이물감 뿐만 아니라 어깨와 겨드랑이에 통증까지 왔다.

“결혼하고 나서 남편이 유방을 만지지도 못하게 했어요. 딱딱한 유방을 남편이 만지면 수술 받은 사실을 알게 될까 두려웠지요.”

이후 17년 동안 어깨 통증은 계속됐고 생리 때는 더욱 심해졌다. 그러나 A씨에게는 통증보다 더한 심리적 고통이 뒤따랐다. 딱딱한 유방이 계속 A씨의 신경에 거슬렸고 나이가 들어 가슴이 처지는 데도 잘못 자리잡은 실리콘 백은 따로 놀았다. 고통은 커져만 갔다.

“하루를 기분 좋게 보냈어도 저녁에 침대에 누워서 가슴을 만지면 갑자기 화가 치솟아 올랐어요. 좋은 마음이 순식간에 원망으로 가득찼지요. 그럴 때면 괜히 아이들에게 짜증을 내곤 했어요.”

몇 년 뒤 그 성형외과를 찾았지만 담당 의사는 이미 떠난 뒤였다. A씨는 다우코닝사 관련 소송 결과를 알게 됐고 실리콘 백을 제거키로 마음을 굳혔다.

A씨의 오른쪽 유방 속 실리콘 백은 이미 터져서 실리콘 겔이 많이 빠진 상태였다. A씨는 기존 실리콘 백을 제거하고 그 자리에 몸에 해가 없는 식염수 백을 채워 넣었다. 식염수 백은 터지더라도 식염수가 소변으로 배출된다.

이 성형외과에서는 지난 석달 동안 4명이 유방확대용 실리콘 백을 제거했다. 보통 1년에 한두 건이 있을까 말까 한 전례에 비춰 급증한 것이다.

A씨의 수술을 맡은 윤원준 원장은 “소송 결과가 알려진 뒤 실리콘 백을 제거하고 싶다는 여성들의 문의전화나 상담이 크게 늘었다”며 “실리콘의 인체 유해 여부가 아직 확인되지는 않고 있지만 환자들은 상당히 두려워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 빼거나 갈아 넣거나

성형외과 전문의들에 따르면 실리콘 제거 수술을 받는 사람들은 실리콘 백을 제거만 하고 그냥 두거나, 갈아 끼우거나 한다. 제거수술 뒤 다시 확대수술하는 비율은 반반이라고 한다.

그러나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의류 사업을 하는 B씨(48)는 소송결과를 보고 20년 전 넣어놓은 실리콘 백을 제거했지만 확대 수술을 다시 받지는 않았다. B씨는 또 다시 이물감을 느끼며 살기는 찜찜하다고 말했다.

실리콘 백을 제거하고 다시 확대 수술을 받는 데 걸리는 시간은 1시간 반에서 2시간 가량. 확대수술처럼 겨드랑이 주름 부위나 유두와 유방의 경계선 부위를 약 2.5㎝ 째고 기존 실리콘 백을 꺼낸 뒤 새 식염수 백을 넣는 방식이다.

확대수술한 지 10년 된 40대 초반의 C씨는 실리콘 백에 문제는 없었지만 “정신 건강상 제거하고 이왕이면 더 큰 사이즈로 만들어 달라”고 요구했다. 결국 C씨는 지난달 용량이 과거보다 더 큰 식염수 백으로 확대수술을 받았다.

성형외과 전문의들은 90년대 중후반까지는 한국 여성들은 대략 150cc 용량의 삽입물을 주로 집어 넣었지만 최근엔 200cc∼250cc 용량의 삽입물을 선호한다고 설명했다.

A씨의 경우 86년에는 120cc짜리를 사용했지만 이번에는 200cc짜리를 삽입했다. 브래지어로 말하자면 B컵에서 C컵으로 커진 것이다.

“내 몸을 거울에 비춰보면 기분이 저절로 좋아져요. 자신감도 생기고 삶에 대한 의욕도 넘쳐나지요. 제 딸이 나중에 자기 가슴에 만족하지 못하면 확대수술을 시켜줄 거예요.”

● 아직도 말 못할 이야기

그러나 모든 여성들이 자신있게 실리콘 제거 수술을 받는 것은 아니다. 아직도 대부분의 여성들은 불안해 하며 실리콘 백을 몸 속에 넣은 채 살고 있다.

1994년 한국여성 1200명을 대신해 다우코닝사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 집단소송을 내 올해 1월 승소한 김연호 변호사(45)는 “1200명 중 80% 이상이 남편과 가족은 과거 확대수술 사실을 모르고 있다”고 말했다.

김 변호사에 따르면 94년 수입 중단 때까지 국내에서 팔린 다우코닝사의 실리콘 백은 모두 1만여짝(2개 1짝)이다. 최소한 1만여명이 이 제품으로 시술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김 변호사가 소송을 준비하면서 모은 원고의 수는 이중 10%에 불과했다. 소송 결과가 보도된 뒤 접수된 신규 피해자도 600여명에 그치고 있다.

김 변호사는 “대부분이 결혼 전 확대 수술을 받고 남편에게 알리지 않아 선뜻 나서지를 못하고 있는 것 같다”면서 “소송 전후에 접수된 1800여명 중 30대 후반에서 40대 후반이 80%를 차지하는 것도 이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전화 또는 방문 상담하는 여성들은 배상금을 언제 얼마나 받을 수 있는지, 배상을 받기 위해 제거 수술을 받아야 하는지 등을 주로 물어온다. 그러나 대부분이 다우코닝사 제품을 썼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섣불리 제거 수술을 권할 수 없다는 것이 김 변호사의 말이다. 또 의료사고가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는 과거 확대수술 기록이 제대로 안 돼 있고 보관도 부실하기 때문이다. 다우코닝사의 제품을 썼는지가 확인되지 않는다면 배상금액 결정 때 불리하다고 김 변호사는 말한다.

김 변호사는 “미국에서 확대수술을 받은 사람의 병원기록을 보니 환자 상태에 대한 의사의 진술만 A4 용지 서너장 정도였다”며 “수술기록을 10년간 보관하게 돼 있는 의료법도 잘 모르는 국내 의사들이 있다”고 말했다.

민동용기자 min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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