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전망대]허승호/정경유착에 골병 든 기업

  • 입력 2003년 2월 16일 19시 3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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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그룹이 연루된 대북송금 문제로 온 나라가 떠들썩하다. 여기서는 이 문제가 경제에 던지는 의미에 초점을 맞춰보자.

현대는 3, 4년 전만 해도 삼성과 함께 국내 재계 1위를 다투던 그룹이다. 그러나 이제 옛 영화는 간 곳 없고 만신창이가 돼 있다. 대북송금과 관련해 계열사간에 소송을 벌이고 있고, 투자자들이 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준비하고 있는 곳도 있다. 앞으로 대북송금의 진상이 드러나면서 송금액을 부담한 법인이 누구인지 자세히 확인되면 현대를 상대로 한 투자자들의 송사가 잇따를 것이 분명하다. 당분간 정상적인 영업활동은 힘들어 보이며 ‘이러다가 현대가 더 어려워지는 것이 아닌가’ 염려될 정도다.

현대가 골병이 든 이유를 여럿 들 수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무리한 대북사업 때문이다. 비록 민족화해와 고 정주영(鄭周永)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고향 사랑’이라는 훌륭한 취지로 시작됐다 해도 이 뜻을 살리려면 모든 당사자에게 이익이 되는 ‘윈-윈’ 방식이어야만 했다. 기업이 살고 경영에 도움이 되도록 사업이 건강하게 추진됐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현대는 여기에 실패해 민간기업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산더미 같은 적자만 안았다.

이런 결과를 낳은 근본적인 원인은 ‘총수의 독단’ 때문이었다. 좋은 의도로 시작된 일이라 할지라도 열린 공간에서 사업내용이 합리적으로 검토되고 걸러지지 않으면 전혀 엉뚱한 결과를 낳기 쉽다.

이번 현대의 대북송금 사건은 우리 경제의 고질적 문제인 재벌체제의 구태를 집약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정경유착, 총수 독단, 이사회 기능 부재, 회계분식, 경영불투명, 주주 무시, 선단(船團)식 경영… 일일이 읊으려니 숨이 차다. 외환위기를 계기로 상당수 그룹에서는 재벌 체제의 문제가 적잖이 해소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현대의 경우 여전함이 낱낱이 드러난 것이다. 관치금융의 폐해도 확인됐다.

이것은 기업하기 좋은 나라가 아니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라는 말이 ‘기업인이 아무런 견제 없이 전횡하기 좋은 나라’라는 뜻으로 해석되어서는 곤란하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가 되려면 혹시 개인이 빠질 수 있는 독단과 편견으로부터 기업과 투자자를 보호할 수 있는 건강한 장치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기업이 생존하고 성장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국·내외 여유자본이 안심하고 투자할 수 있겠는가.

만에 하나 외국의 신용평가기관들이 현대 사례를 보고 한국 기업 경영 전체가 불투명한 것으로 확대해석해 또 한번 신용등급 조정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지 걱정스럽다.

결국 현대 사건은 기업의 ‘의사결정 시스템’에 문제가 있음을 드러냈다. 좀 유식한 척하면 ‘기업지배구조’의 문제다. 여러 그룹에서는 총수가 일부 지분만으로도 전권을 휘두르고 있다. 이같은 한국식 소유지배구조가 왜 고쳐져야 하는지를, 대북송금 사건으로 거덜난 현대가 잘 가르쳐주고 있다.

허승호 경제부 차장 tige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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