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인생의 음악]'리골레토'의 부녀 이중창

  • 입력 2003년 1월 14일 19시 1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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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악을 전공하겠다는 누이동생을 둔 오빠들은 ‘항상 같은 곳에서 틀리는’ 연습곡을 무수히 들어야 한다. 곡의 제목조차 모르지만, 결국 소나타 수준의 곡 몇 개는 어느새 끝까지 중얼거리며 따라 갈 수 있을 정도가 된다.

방음시설이 좋을 리 없는 단층 단독 주택에서 나도 피아노 소리를 들으며 수학문제를 풀고 영어 단어를 외웠다. 나 역시 피아노 치는 동생의 오빠였던 것이다. 내게 있어 음악은 피아노 소리와 동일한 것이었고, 점수를 얻기 위해 음악 시간에 배운 것 이상은 아니었다.

나이가 들어 별로 재미가 있어 보이지 않는 일을 하게 된 내가 헌법재판소에 파견 나가 근무하게 된 어느 날, 운명이 정해 놓은 것처럼 전기(轉機)가 찾아 왔다. 선배 연구관이 그 날 장인의 출판기념회에서 플루트를 독주하게 되어 있는데 모든 연구관을 불러 놓고 연습 즉 리허설을 하겠다는 것이다. 음악가가 아닌데 음악을 이해하다니! 그것은 굉장한 충격이었고 특유한 나의 ‘질투’를 발동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아무 생각 없이 레코드점을 달려간 나는 가장 멋져 보이는 CD 한 질을 사 가지고 와서 플레이어에 올려놓았다. 어느 순간 나오기 시작한 소프라노와 바리톤의 이중창은 벼락을 맞은 듯 나의 숨을 멎게 하였다. 베르디 오페라 ‘리골레토’ 제1막 제2장에서 부녀간의 이중창이 나오는 부분이다. 갑자기 폭발적인 힘으로 연주되는 현 속에서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하나 뿐인 딸에게 죽은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광대 리골레토, 한이 서린 듯 애절한 음성….

다음 날부터 미친 듯이 다른 오페라 CD를 사들이기 시작했다. 줄거리도 익히고 작곡 과정, 배역의 성격, 가수들에 대해서도 공부하게 되었다. 변화무쌍한 천만가지 소리를 낼 수 있는 악기인 ‘목소리’를 나도 모르게 사랑하게 되었고, 오페라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몇 년 후 어느 일요일, 서울에 올라와 있던 나는 아침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하자 급히 차를 몰고 근무지인 충주로 향했다. 생각 밖으로 금새 폭설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결국 충주까지 무려 12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나는 차안에서 혼자 오페라 3곡 즉 CD 6장을 두 번씩이나 아무 방해 없이 들을 수 있는 행운을 만끽했다. 어느새 오페라가 없는 나의 인생을 생각할 수조차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내가 처음 들었던 오페라 리골레토의 2중창은 바리톤 레오 누치와 소프라노 쥰 앤더슨이 부른 것이었다. 나는 지금도 그 둘의 목소리를 매우 좋아한다. 피아노 소리? 학생시절 그랬듯 지금도 싫어한다.

윤홍근(부장판사·사법연수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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