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일/발의 미학]발, 원초적 에로티시즘

  • 입력 2002년 7월 4일 16시 20분


《직립 이래 인간에게 발은 늘 있으되 언제나 잊혀져 있는 부분이었다. 그러나 발과 다리의 향연 월드컵 대회는 ‘아름다운 발’ ‘섬세하고 예민한 발’을 다시 보게 만들었다. 어머니인 대지를 딛고 선 성적 상징으로서, 남자의 발이 얼마나 에로틱한가도 재발견됐다. 현대적 육체 속에 깃들어있는 원시, 발. 그 오묘한 능력, 함축된 에로티시즘, 발을 갈고 다듬는 사람들의 정성과 욕망….》

안정환 선수의 발은 작다. 나이키사에 따르면 안 선수는 키 178㎝에 몸무게가 78㎏인데 발의 크기는 255㎜다. 웬만한 여자 모델보다도 작다. 키가 172㎝인 이천수 역시 255㎜이고 173㎝인 윤정환은 250㎜로 더 작다. 이민성(183㎝) 이을용(176㎝) 현영민(179㎝) 이영표(176㎝)도 발 크기가 260㎜로 키에 비해 작다. 박지성(176㎝)은 가족 설명 기준으로 260㎜.

●작은 농부의 발

“축구선수들의 발이 작은 이유는 발 감각을 기르기 위해 어려서부터 꽉 끼는 축구화를 신다 보니 발이 정상적으로 자라지 못한 탓이다.”(을지병원 족부정형외과 이경태 과장)

아예 평상화보다 한 치수 작은 축구화를 신는 선수들도 있다. 한국대표선수 23명 가운데 왕발은 골키퍼 김병지(184㎝, 280㎜). 송종국(178㎝)과 설기현(184㎝)이 275㎜로 뒤를 잇는다. 어려운 유년 시절을 보낸 탓에 변변한 축구화를 신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국 선수들의 발은 대개 발가락 길이가 일자로 비슷하고 폭이 넓어 ‘농부의 발’로 불리는 마당발이다. 유럽 선수들은 폭이 좁고 새끼발가락으로 갈수록 길이가 짧아지는 모델발(칼발)이나 엄지발가락 길이가 긴 ‘이집트인의 발’, 둘째 발가락이 가장 긴 ‘그리스인의 발’이 많다. 영국의 베컴은 길고 뾰족한 칼발이다.

축구 선수들의 발은 티눈과 굳은살 투성이다. 발가락은 갈퀴처럼 휘었고 엄지발가락이 바깥쪽으로 쏠려 안쪽 뼈가 불거져 나온 ‘버선발’ 기형이 많다. 엄지 발가락의 발톱은 수도 없이 빠져 거무스름하게 색이 죽어 있다.

●손같은 발, 맨발의 감각

축구 선수들은 요족(凹足)이 많다. 발 밑 쑥 들어간 부분이 아치인데 축구선수 10명 중 7명은 정상인보다 아치가 높다. 요족은 땅을 찍고 달려 나가기에 그만이다. 점프와 순간 스피드를 내기에 유리하다. 평발은 속도를 내기 어렵고 쉽게 피로를 느끼게 된다. 박지성은 성공한 평발이다. 지난해 부상해 병원을 찾았을 때 박 선수를 알아보지 못한 의사는 “평발이니 뛰는 것은 물론 많이 걷지도 말라”고 했다.

유럽과 남미 클럽에서는 어릴 때부터 발가락을 옆으로 벌렸다 오므렸다 하도록 시키고 발가락을 순서대로 꼽기 운동을 시킨다. 수건을 발가락으로 꼬거나 집어 나르는 운동도 소근육 강화에 좋다.

인도는 1950년 브라질 월드컵 본선 진출권을 따고도 대회 출전을 포기해야 했다. 국제축구연맹(FIFA)이 선수를 보호하기 위해 ‘축구화를 신지 않으면 안된다’고 정식 통보했기 때문이다. 인도는 “맨발이 아니라면 뛸 수 없다”며 기권했고 이후 단한번도 본선에 진출하지 못했다.

맨발을 고집하는 이유는 공에 대한 감각을 잃기 싫어서이다. ‘신을 신고 걸으면 길을 잃을 것 같다’던 인디언처럼…. 축구화의 미덕도 ‘신은 듯 만 듯’ 한 데 있다. 맨발 같은 신발을 향해 축구화는 진화해 왔고 이번에 나이키는 운동화 한짝의 무게가 196g에 두께가 3㎜인 머큐리얼 베이퍼를 내놓았다.

스포츠용품사는 후원선수에게 경기당 3켤레 정도의 축구화를 준다. 베컴은 매번 새 축구화를 신고 나왔고 지단이나 라울은 1켤레로 2, 3경기를 소화하는 알뜰파였다. 한국 선수들은 훈련 때 신은 축구화를 그대로 신는 경우가 많다. 박지성과 유상철은 구두약으로 축구화를 깨끗이 닦아 신는다.

●아름다운 남성의 발

‘축구에 넋을 잃은 여성들’이 2002 월드컵이 낳은 새로운 문화현상의 톱뉴스였지만 발의 성적인 상징성을 감안하면 놀랄 일도 아니다. 프로이트는 발이 남근을, 신발은 여자 성기를 상징한다고 했다. 미국의 발치료 전문의인 윌리엄 A 로시는 저서 ‘에로틱한 발’(그린비)에서 발이 남근을 상징하는 이유로 “모든 생명의 원천인 어머니 대지와 접촉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축구 선수들의 움직이는 발과 다리 근육의 떨림은 새로운 성애적 모티브가 되고 있다. 미의 대상을 바라볼 때 사람들은 적당한 거리를 설정하고 시각과 청각만을 활용한다. 그러나 축구 경기에서는 참여적 미학을 경험하게 된다(홍익대 예술학과 김혜련 강사). 포르노를 볼 때 흥분하듯 축구 경기를 보면서 자기도 모르게 발길질을 하고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근육의 흥분을 느낀다.

발의 에로티시즘을 일찌감치 터득한 사람들은 제화업자들이었다. 여성의 구두는 적절한 노출이 목적이다. 그러나 남자들의 구두는 어지간해서는 맨살을 드러내지 않는다. 보는 것 만으로도 단단함이 느껴지는 디자인이어야 한다. 여성의 발은 하이힐 위에서 관능적으로 빛나지만 남자의 발은 힘있고 잘 기능함을 증명해 보여야 한다. 축구 선수들의 발이 주목을 받는 때도 그라운드를 달리는 바로 그 순간이다.

이진영기자 eco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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