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평인기자의 현장칼럼] 神난다! 신학자의 춤판

  • 입력 2002년 1월 3일 17시 24분


<<춤추는 여신학자 정현경(45·미국 뉴욕 유니언신학교 교수).그녀는 신을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신을 표현할 뿐이다. 신을 표현하는 신학자로서 그녀에게 파티는 예배와 같은 것이다. 어원적으로 맞든 안맞든 그녀는 신난다를 신(신)이 나온다, 신이 태어난다로 해석한다. 그녀는 ”밥 말리나 티나 터너의 라이브 공연실황을 보면서 신나는 걸, 신이 나오는 걸 느낀다”고 말한다. 그렇게 파티는 ’신 없음’에서 ’신 있음’으로 변화가 이뤄지는 시간이고 장소다. 정 교수는 최근 시립 청소년 직업체험센터인 영등포 하자센터의 999클럽에서 파티를 열었다.너무 솔직해서 발칙해 보이는 소녀들과 함께. 그것도 광란의 댄스파티를.... 하자센터 서클 '소녀들의 페미니즘' 멤버 13명과 공동주최자가 된 이 파티의 구실은 정 교수의 자서전적 신간 '결국은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 꺼야 1,2'와 '미래에서 온 편지'의 출판기념회.>>

재즈가수 사라 본의 ‘플라이 미 투 더 문(Fly me to the Moon)’이 잔잔히 흐르자 마음 급한 소녀 몇몇이 무대 가운데로 나와 가볍게 몸을 흔든다. 조한혜정 연세대 교수(문화인류학), 페미니스트 잡지 IF의 유숙렬 편집위원, 여성문화예술기획 대표 이혜경씨 등 한국의 페미니즘을 이끌어가는 어른 세대도 자리를 같이 했다. 초청자가 된 13명의 소녀들과 그 소녀들의 남녀 친구들. 춤에 관한 한 이들은 가속기를 밟자마자 고속질주하는 성능 좋은 자동차 엔진 같다. 파티는 순식간에 본 궤도에 오른다. 잘났든 못났든 섹시하게 치장하고, 잘 추든 못 추든 거침없이 춤추는 소녀들은 머리로 페미니스트가 되기 전에 이미 몸으로 페미니스트가 된 듯하다. 어머니뻘 되는 페미니스트들도 소녀들의 춤을 부러운 듯 쳐다보다 슬며시 춤판에 끼어든다.

“세계 일주를 해야 하는데 손에 만원도 없다. 있는 거라고는 몸밖에. 십대 성매매를 떠올린다. 믿을 거라고는 나밖에.”(성경)

“made in 20(이동통신 TTL 광고에 나오는 카피). made in 20라는 말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 나는 세상을 갖지 못해. 세상을 가질 수 있다는 made in 20는 거짓말이야.”(상츄)

“아빠는 죽으려고 그랬는지 미쳐 날뛰는 사람 같았어. 엄마는 자신과 나와 오빠를 미친 아빠로부터 지키려고 노력했고, 그리고 가슴이 단단해져서 병원에 갔다. 암이래. 유방암. 병원을 나서는데 그때 아빠는 옛날에 사실 엄마 몰래 들어놓은 암보험이 있다며 자랑스러워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엄마가 유방암에 걸렸는데 어떻게 저 남자는 저런 말을 하면서 웃을까. 두려웠다.”(원)

성경(20) 상츄(19) 원(19), 학교를 나와 하자센터 작업실에 다니는 ‘소녀들의 페미니즘’의 멤버들. 정교수는 반년 전쯤 이들에게 긴 편지를 띄웠다. 씨받이 어머니에게서 태어나 32년간 생모가 누군지도 모르고 살았던 얘기, 전태일의 어머니를 양모로 모실 정도로 열렬한 운동권이었으나 종교적으로 근본주의 기독교에 가까웠던 남자와의 결혼과 이혼, 여학생시절 니카라과에서 열린 평화회의에 참석했다가 한 ‘혁명의 투사’에 강간당한 얘기까지….

그녀는 쇼킹할 정도로 완전히 ‘옷’을 벗었다. 평생 한번도 ‘범생(모범생)’ 인척해 본 적이 없는 소녀들은 어른들도 그만큼 솔직해질 수 있다는 데 놀랐다.

파티에 참석한 경동교회 강원룡 원로목사는 정현경을 갓난아기 때부터 지켜봤다. 그는 “신학자가 학문적인 책을 써야지 왜 그런 사사로운 얘기를 써서 논란을 자초하느냐”며 책 출간을 극구 만류했다. 그때 그녀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노동운동은 노동운동을 공부하고 연구하는 사람이 많아서가 아니라 분신자살한 전태일로 인해 폭발한 것입니다. 여성운동을 위해 분신자살하는 마음으로 책을 냈습니다.” 그녀는 책에서 페미니즘이 무엇인지 설명하려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얘기로 페미니즘을 표현했을 뿐이다.

그녀는 신학자로서 현대인의 삶에서 구원의 의미를 묻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로마나 메카가 아니라 뉴욕이야말로 신학하기에 가장 좋은 곳”이라고 말한다. 뉴욕은 꿈의 도시이자 그 꿈이 깨지는 곳이기도 하다. 꿈이 깨어질 때, 아메리칸 드림이 악몽으로 바뀔 때 인간은 신을 찾는다. “다이아몬드 목걸이에 밍크코트를 입고 고급차에서 내리는 귀부인과 그 앞을 비닐봉지를 들고 추위에 떨며 지나가는 흑인 남자가 공존하는 곳, 이보다 더 신학적인 도시가 어디 있느냐”고 그녀는 반문한다. 실제로 그녀의 강의 ‘아시아 종교에서 본 질병과 치유’에는 월 스트리트의 전직 증권맨, 에미상을 수상한 TV 프로듀서, 현대미술관의 큐레이터 등 전문직 출신의 비(非)신학생이 수강생의 절반가량을 차지한다. 현대의 뉴욕은 종교개혁기의 제네바처럼 새로운 신학이 싹트고 있는 곳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전통종교에서 남신(男神)의 그늘에 놓여 있던 여신(女神)의 세계를 추적해 왔다. 여신을 통해 남신의 세계를 해체하려고 했다. 힌두교의 칼리, 대승불교의 관음보살, 티베트불교의 타라…. 그녀의 방은 수많은 여신들의 조각과 그림으로 가득 차 있다. 여신의 세계를 찾아 수차례 인도 힌두교의 성지 히말라야를 다녀왔고 베트남 출신의 틱낫한 스님과 한국의 숭산(崇山) 스님으로부터 계를 받기도 했다. 미국의 9·11 테러는 남신을 섬겨온 두 세계(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충돌과 임박한 몰락을 보여주는 징조라고 그녀는 본다. 구원은 남신이 아니라 여신으로부터 올 것이다. 그 여신은 주로 아시아 등 제3세계에 산재해 있다. 폴 틸리히, 라인홀트 니버 등 20세기 최고의 신학자들이 교수로 있었던 뉴욕 유니언신학교가 제3세계 여성신학자 정현경을 종신교수로 채용한 것은 그녀의 작업에 걸고 있는 기대가 그만큼 크다는 증거다.

이날의 파티는 여신의 세계로의 초대다. 소녀들 속에 들어있는 여신, 그 신기(神氣)가 나오게 하는 ‘원시적인, 그러면서도 미래적인’ 굿이다. 대머리 여가수 지현이 나와 ‘마스터베이션’을 부른다. 신음소리로 가득찬 그 노래에 소녀들이 열광한다. 낯뜨거운 경험을 나누며 소년들이 형제애를 느끼듯이 소녀들도 자매애를 키워간다. 그들 속에서 ‘한 소녀’가 되어 춤추는 정 교수는 포스트모던시대의 무당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송평인기자>pisong@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