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데뷔시절]차인표, 오렌지족으로 뜨니 한동안 그런 배역만 …

  • 입력 2001년 6월 13일 18시 42분


나는 한국외국어대 경영학과를 다니다가 1987년 미국으로 떠났다. 어머니가 갑자기 신학을 공부하시겠다고 해서 따라 나선 것이다. 뉴욕 아래에 있는 뉴저지에 정착해 뉴저지 주립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다.

대학 졸업후 귀국하는 것을 놓고 망설였지만 뉴욕의 활기가 나를 붙잡았다. 기차로 2시간씩 통근하면서 맨해튼에 있는 한진해운 뉴욕지사에서 일했다.

살아남기 위해 온갖 짓을 다했다. 고객들에게 문전 박대 당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대학 다닐 때부터 웨이터, 페인트칠에 정신병원 아르바이트까지 섭렵한 터라 ‘더러워서 못해 먹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미국 생활이 7년째 접어들면서 한국이 그리워졌다. 내 안에 있는 다른 ‘끼’를 살려보고 싶어 어머니와 심각하게 상의했다. 결국 비행기를 탔고 1993년 MBC 공채 22기 탤런트로 연예계에 입문했다.

1년 간의 무명 시절을 거쳤지만 1994년 베스트극장 ‘하얀 여로’에서 미국으로 입양됐다가 주한미군이 되어 모국에 돌아온 입양아 역할을 맡으면서 기회를 엿보기 시작했다.

그해 6월 방송된 MBC ‘사랑을 그대 품안에’에 주인공 역을 맡으면서 나는 대단한 반응을 얻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어리둥절할 정도였다.

집 앞에는 학생들이 수십명씩 진을 치고 있었고, 내가 극중에서 불던 색소폰 덕분에 재즈 붐이 일기도 했다. 그러나 극중 ‘강풍호’의 이미지 때문에 나는 미국에서 건너온 ‘수입 오렌지’로 사람들에게 각인됐다.

나는 정말 억울했지만 사람들이 기억하는 것은 내 뉴욕식 영어와 헬스로 다져진 몸 뿐이었다. 그리고 한동안 나에게는 ‘오렌지’ 계열의 배역만 들어왔다.

내가 PD나 기자를 만날 때마다 고생담을 입버릇처럼 들려주는 것도 이 이미지를 불식시키기 위해서였다. 최근 출연 중인 MBC 주말드라마 ‘그 여자네 집’에서의 수더분한 이미지가 내 원래 모습이라는 걸 알리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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