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만은 버리고 가자]은희경/획일주의는 이제그만

  • 입력 1999년 12월 1일 19시 19분


어느 스승의 날엔가 독자투고란에서 한 교사의 글을 읽었다. 담임을 맡았던 학생에 대한 반성의 글이었다. 당시에는 손에 드는 가방을 갖고 다니는 게 학교규칙이었는데 그 학생은 어깨에 메는 가방을 고집했다. 교사는 매일같이 질책을 했고 고집을 꺾지 않던 학생은 결국 반항적인 자퇴를 했다. 그 뒤 몇 년이 지나지 않아 모든 학생이 어깨에 메는 가방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 교사는 자신이 학생들에게 강요하는 많은 규칙이 획일화된 형식주의에 지나지 않은지 회의하고 있었다.

나는 조회 때마다 국민교육헌장을 달달 외우며 자란 세대다. 초등학교 입학식 때 왼쪽 아닌 오른쪽 가슴에 손수건을 달았다고 야단을 맞은 이후, 무슨 의미가 있는지 납득하지 못한 채로 규율 속에 나를 맞추어갔다. 남들과 다른 것은 무조건 건방지고 불온한 일이었다. 에디슨이 달걀을 품은 이야기를 들려주며 창의성을 강조하던 선생님도 단지 줄을 똑바로 서지 않았다고 손바닥을 때렸다.

◆'나'아닌 규격인생 강요

지금도 나는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면 내가 무슨 잘못을 했나 가슴이 철렁한다. 또 제복을 입거나 완장을 찬 사람들에게 이유없이 주눅이 든다. 그때마다 내 머릿속에는 공장이나 학교가 소속된 사람들을 똑같은 시각에 맞춰 움직이도록 통제하는 것은 규칙에 복종하도록 만듦으로써 인간의 자유 의지를 무력하게 만들려는 의도였다는 주장이 떠오르곤 한다.

획일적인 형식주의는 자기의 정체성을 파악하지 못하게 만든다. 나라는 존재의 개별적 가치와 존엄성을 깨치기는커녕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질문해보지 않은 채 어른이 된 사람들. 그들은 순응주의자이다보니 쉽게 보수화되고 관행에 익숙해지며 남과 같아야만 안심한다. 매스컴이나 광고의 일반론에 간단히 자기를 일치시키는 것도 그 때문이다. 물건을 고를 때도 “이거 좋아요”보다 “이거 지금 잘 나가는 물건이에요”에 더 현혹되게 마련이다. 장애인이나 소수에 대한 편견도 근본적으로는 남과 다른 것에 융통성을 발휘할 수 없는 획일주의와 무관하지 않다.

획일적인 형식주의의 가장 못된 사생아는 이중성이다. 우리 사회만큼 이중적인 잣대가 많은 곳도 드물 것이다. 사회의 건강성에 대한 토론회를 주도한 사람도 뒤풀이로 룸살롱에서 주연을 벌인다. 자기모면만을 위해 공직자들은 거짓말을 일삼고 뒷거래를 모르는 사람들은 언제나 손해를 본다.

◆미국의 힘은 다양성

따지고 보면 과열경쟁도 획일주의와 관계가 있다. 모두가 한 방향으로 달려가기 때문에 길이 좁아지는 것이다. 그런데도 다른 길을 만드는 사람들의 방법을 인정하지 않으려 드는 것이 획일주의가 가진 배타성이다. 모난 돌이니 정을 맞아 당연하다는 식이다.

잠깐 미국에 머물렀을 때의 일이다. 샴푸를 사러 갔다가 너무 종류가 많아 질려버렸다. 머리카락이 짧은가 긴가, 숱이 많은가 적은가, 곱슬머리인가 반곱슬머리인가 등등 수많은 항목을 분류하고 거기에 맞는 다양한 제품을 선택하도록 되어 있었다. 내게 던지는 미국인 친구의 말이 더 인상적이었다. “난 제일 싼 것을 택하니까 이런 다양성이 필요없어.” 많은 다양함이 있고 거기에다 그것을 선택하지 않을 다양함까지 갖춰졌다니…. 나는 속으로 “졌다”라고 중얼거리고 말았다.

사람의 삶에 한 가지 답안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자기 식대로 살고 사랑하도록 존중받는 사회 속에서 내 아이가 제 삶에 만족하며 살아갈 날을 상상해본다.

은희경〈소설가〉

다음회 필자는 윤구병씨(농부·변산공동체학교 교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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