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현의「우리 거리」읽기2]너희가 종로를 아느냐

  • 입력 1999년 1월 11일 19시 31분


턱시도, 산소통, 징, 김밥, 족보. 이들의 공통분모는 뭘까. 여기에 손목시계, 도색잡지, 휠체어, 화분, 오락실을 첨가해도 된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무엇이나 집어넣어도 된다. 답은 종로다. 종로에 가면 이 모든 것을 만날 수 있다. 종로의 구석구석에 기쁘고 슬프고 아쉬웠던 추억의 한 부분을 묻어두고 있지 않은 사람이라면 서울시민이라고 할 수 없다.

종로는 6백년의 애환을 고스란히 담아왔다. 육의전(六矣廛)에서 모시를 팔던 할아버지는 동대문을 거쳐 들어온 왜장 고니시(小西行長)를 보고 서러운 눈물을 종로에 펑펑 쏟았을 것이다. 마누라에게 설렁탕 한 그릇 사줄 만큼 ‘운수좋은 날’을 찾아 김 첨지의 인력거는 종로를 몇 바퀴나 돌았을 것이다. 아들이 고시에 합격한 날, 남산부터 북촌까지 길어다 주던 물지게를 팽개치고 북청 물장수는 종로를 그렇게 내달았을 것이다. 종로는 이 땅에 살던 무지랭이들의 희노애락을 담아내던 그릇이었다. 종로는 길이면서 마당이면서 좌판이기도 했다. 종루에 매달린 종을 쳐서 도성의 통행금지를 맺고 풀던 심장부였다. 금난전권(禁亂廛權)을 휘두르던 시전(市廛)상인들이 전국의 경제권을 흔들던 현장이었다.

종로는 예사로운 길이 아니었다. 조선 개국 때 만들어진 계획도로였다. 서대문부터 동대문까지 서울을 가로지르는 혈관이었다. 그러니 모든 길은 당연히 종로로 통했고 종로에서 끝났다. 광화문 앞의 육조거리도 황토마루(黃土峴)에서 종로를 만났다. 남대문길도 종로에서 끝났다. 전차도 지하철도 종로를 지나야 하는 건 당연했다.

일제의 새로운 도시계획은 종로를 토막토막 자르기 시작했다. 좁은 잡길들은 넓혀지고 광화문 네거리에서 동대문까지 나뉜 여섯 마디는 일본식 이름으로 종로 1정목(丁目), 2정목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그 길은 종로 1가, 2가가 되었다. 그리고 마디마다 조금씩 다른 모습을 갖기 시작했다. 자동차가 다니기 시작하고 인도가 양분되면서 남북으로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종로는 열 두 개의 막을 지닌 시나리오가 되었다. 그 안으로 들어가 보자.

광화문 네거리에서 시작되는 종로 1가는 서울의 한가운데다. 2가와 합쳐서 한국에서 은행이 가장 많이 몰려있는 곳이다. 남쪽의 서린동은 재개발이 되어 덩치 큰 건물들이 종로에 면해 자리를 잡고 있다. 반면 북쪽 청진동은 아직 올망졸망한 건물들이 빼곡이 들어서 있다. 가게들에는 온갖 먹을 것, 볼 것들이 즐비하고 이면도로는 해장국집으로 대표되는 밥집의 세상이다. 그러니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수는 북쪽 길에 압도적으로 많다. 사람 사는 맛, 거리를 걷는 맛을 빼앗아 가는 재개발의 문제를 한눈에 보여주는 거리다.

종로 2가는 종로의 프리마돈나다. 종각부터 단성사까지의 주인공은 단연 젊은이들이다. 교복을 입고 학교를 다닌 인생이라면 그들이 지금 쉰세대가 되었건, 낀 세대가 되었건 지금의 출퇴근시간 신도림역을 방불케 하던 YMCA부근 학원가에 학창시절의 한 부분이 묻혀있을 것이다. 1980년에 입시학원은 추방되고 재수생은 노량진, 용산으로 흩어졌어도 이 동네의 나이는 아직 젊다. 책방과 외국어 학원과 분식집으로 대변되는 거리의 나이는 십대 후반, 이십대 초반이다.

그러나 백전노장의 우리 할아버지들이 호락호락 종로를 내주지는 않는다. 3·1운동의 기개는 탑골공원을 지키고 있다. 종로 2가 관철동에서는 이십대 후반이면 중늙은이가 되고 탑골공원 앞에서는 오십대 후반도 새파란 젊은이가 된다. 하지만 종로는 열려 있다. 자루바지를 입은 열혈남아도 탑골공원 앞 헌혈차에서 나이 어리다고 쫓겨나지 않는다. 지하철에서는 경로석에 앉는 할아버지도 관철동에서 통만두를 주문할 때는 공평히 선불을 내야한다. 중요한 건 주민등록증상의 나이가 아니고 거리를 걷는 마음이다.

종로 3가의 극장가가 끝나면 종로는 다시 바뀐다. 노점상의 취급품목이 전자계산기, 공구로 달라진다. 나이도 열살 넘게 많아진다. 분위기도 착가라앉는다. 걸음을 더 옮기면 한약방, 양약방, 약초상, 화초상이 교대로 등장하고 나이는 점점 많아진다. 그리고는 결국 동대문에 닿는다. 시집갈 딸의 혼수를 위해 동대문시장을 들락거려보지 않은 이 땅의 어머니는 얼마나 될까.

종로는 아름답다. 온갖 세상사가 이리 저리 버무려진 종로에서 무질서를 보는 사람은 종로를 걸으면서도 기쁠 수 없다. 종로는 무질서가 아니고 에너지이기 때문이다. 어둡고 짜증나는 생활이 느껴지면 종로를 걸어 보라. 그대의 인생은 종로 몇 가형인가. 외국인 관광객이 탑승했다고 버스에 써 붙이고 고궁과 민속촌, 남산을 배회하게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한국 사회는 그런 곳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들끓는 에너지, 지구 위의 다른 어디에서고 찾아 볼 수 없는 그 에너지가 한국의 모습이다. 관광자원이다. 그리스에 가서 시장거리의 수블라키(souvlaki) 대신 기어이 맥도날드 햄버거를 먹어야겠다고 하는 관광객은 아크로폴리스에 오를 자격이 없다. 호텔 스탠드바에서 마티니를 홀짝거리기 원하는 이는 종로에 나서 봐야 소용이 없다. 적당히 지저분하고 무례하고 시끄럽고 신나는 곳이 우리의 도시다. 어깨가 부딪치고 발을 밟혀도 하하 웃으면서 먹던 붕어빵을 마저 먹으며 지나가는 환한 얼굴을 그들에게 보여 주라. 누구도 외로울 수 없는 우리의 종로를 보여 주라.

종각 네거리에는 유독 남쪽 모서리들에만 삼각형의 교통섬이 있다. 남대문길이 와서 끝나던 6백년의 자취가 길에 남아있는 것이다. 종로는 강남의 여느 길이 아니다. 종로의 건물들은 길을 향한 뒷 배경들이다. 모두 종로를 면해 경의를 표해야 한다. 다소곳이 줄을 서 있어야 한다. 그 역사의 무게를 내던질 자격이 있는 건축가는 없기 때문이다.

이렇던 종로에 도전장이 날아들었다. 종로가 어떤 길인지 관심이 없는 건물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화신백화점 자리에 삼성플라자 건물이 모습을 나타냈다. 우루과이 태생의 미국인 건축가가 설계한 이 건물은 유난스런 모습으로 눈길을 끌기 시작했다. 덩치도 큰 친구가 혼자서 큰 소리로 떠들기 시작하면서 종로를 가리기 시작했다. 개미나라에 날아 온 메뚜기처럼 줄을 흩뜨려 놓기 시작했다. 모든 건물들이 종로 거리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도열해 있는 것은 종로의 역사에 대한 경배의 표시다. 그런데 삼성플라자는 그렇지 않다. 혼자서만 삐딱하게 서있으니.

이국인 건축가는 잠시 둘러보는 관광객의 눈으로 종로를 스쳐갔을 것이다. 종로에 대한 관심도, 서울에 대한 애정도 없었다. 왜 옆의 제일은행 본점이 다소곳이 종로에 맞춰 줄을 서있는지 알지도 못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거대자본과 오만한 이국 건축가에 의해 종로는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남의 눈에 잘 띄어야 광고도 되고 장사도 잘된다는 주판알 너머로는 6백년 역사가 보일 수가 없었다.

‘보신각 골목길을 돌아서 나올 때에’ 한숨은 흘렀다. 마로니에 잎은 나부끼고 담배만 타들어 갔다.

서현<건축가> hyun1029@chollia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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