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최정호/통일시대의 대통령감은…

  • 입력 1997년 4월 1일 19시 51분


유럽 속담에 「누구나 아버지가 될 수는 있다. 그러나 아무나 아버지 노릇을 하는 건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아기 아버지가 되는 것은 쉬워도 집을 마련하고 살림을 꾸려가며 아이들을 가르치는 집안의 수장(首長) 노릇을 하기란 쉬운 게 아니라는 뜻이다. 대통령은 국가 원수, 나라의 으뜸가는 수장이다. 누구나 선거에서 이기면 대통령이 되기는 한다. 그러나 아무나 제대로 대통령 노릇을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이 진실을 한국의 유권자들도 이제는 뼈아프게 배우고 있다. 정부 수립 후 여섯분의 대통령이 나왔지만 영예로운 퇴임후의 삶을 누린 「전직」은 아직 한 분도 없다. 대통령이 된 사람은 많지만 대통령 노릇을 제대로 한 사람은 드물었던 것이다. ▼ 우선 法治부터 세우라 ▼ 덕(德)이 있는 대통령을 갖는다는 것은 국리민복(國利民福)에 속한다. 그 대신 부덕한 대통령을 갖는다는 것은 나라의 화근이요, 국민의 불행이다. 하지만 대통령을 뽑은 것이 국민이고 보면 나라의 화복(禍福)은 국민이 선택한 결과요, 다른 누구에게 책임을 돌릴 수도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훌륭한 대통령「감」이란 어떤 인물인가. 건국 이후 새로운 반세기가 시작되는 내년에 취임해 21세기 「통일한국」의 시대를 열어갈 대통령에게 요구되는 자질이란 어떤 것일까. 과욕은 부리지 않기로 한다. 과잉기대나 과대한 요구도 삼가고자 한다. 한국 경제의 「거품」을 걷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은 한국 정치의 거품도 걷어야 할 때다. 역사 발전은 시간을 단축할 수는 있어도 단계를 생략할 수는 없다. 우리는 유럽이 몇 세기에 걸쳐 이룩한 산업화를 한 세대 안에 성취했다고 자랑해왔다. 유럽이 수백년에 걸쳐 이룩한 민주화를 불과 50년만에 쟁취했다고 우쭐대고도 있다. 그래서 「선진국」의 진입이네, 세계의 「중심국가」네 하는 말을 겁도 없이 쉽게 되뇌고 있다. 그러한 주제에 우리는 아직 「법치국가」의 터전조차 굳히지 못하고 있다. 유럽의 근대화는 그러나 산업화보다, 민주화보다 앞서는 법치주의의 확립으로부터 시작됐다. 「왕(王)이 법(法)」이 아니라 「법이 왕」이 되면서 비로소 근대국가는 탄생했던 것이다. 「법의 지배」 「법앞에서의 평등」은 민주주의나 사회정의에 앞선 근대사회의 기본원리다. 근대유럽에 앞서 이미 2천년 전 고대 로마의 역사가 수에토니우스는 『황제도 문법가(文法家) 위에 설 수 없다』고 말한 바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李承晩(이승만)박사가 1950년대에 한글철자법이 어려우니 고치라고 우겨 대통령이 문법가 위에 군림하려 했던 현대사를 기록하고 있다. 초대 대통령의 후계자들도 그들의 이른바 「통치권」을「법의위에, 법에반해, 법의 밖에(supra jus, et contra jus, et extra jus)」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행동했다는 점에서는 대동소이했다. 국가의 주장이 그처럼 법을 무시하니 나이어린 공화국의 국법질서가 바로 설 수 없다. 21세기를 여는 이 나라의 대통령은 「세계의 중심국가로, 일류국가로」라는 나팔을 불어대기보다 이 나라를 법치국가로 만드는데 솔선수범해주는 사람이기를 바란다. 법의 세계는 「공(公)」의 세계다. 「내 권속(眷屬)이래서, 내 향당(鄕黨)이래서」하는 혈연 지연 학연 따위의 「사(私)」를 앞세우면 「법의 지배」 「법 앞에서의 평등」이란 공의 세계는 설 자리를 잃는다. 법이 유명무실해지면 공동체 생활은 예측불가능한 것이 되고 합리적인 설계가 불가능해진다. 사를 제치고 공을 앞세운다는 것은 「전체」를 생각한다는 것이다. 모든 국민은 나를, 나의 식솔을, 나의 집안을 생각하고 또 그게 당연하다고 하더라도 대통령만은 그럴 수가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 대통령으로 나서지 않았다면 몰라도 일단 대통령이 된 이상 나의 혈연 지연 학연을 떠나서 국민의 「전체」, 나라의 「전체」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그것은 특히 민족통일의 큰 과업에 도전해야 할 21세기를 여는 대통령이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기본 덕목이다. 동방정책으로 독일 통일의 기초를 닦은 빌리 브란트는 그의 회고록에서 「정치란 인간적인 실존의 전체를 감싸는 것」이라 적고 있다. 그래서 그는 그러한 정치를 위해 가장 절실한 것이 케네디대통령 형제에게 있어 정치적 열정의 열쇠말이었다는 「동정(Compassion)」이라 밝히고 있다. 「컴패션」은 남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느낄 수 있는 마음, 남의 괴로움, 남의 슬픔을 나의 괴로움, 나의 슬픔으로 느낄 수 있는 능력이다. 실지(失地)를 회복하고 인구 7천만의 「대국」을 만들기 위해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떠벌린다면 나는 그처럼 무정(無情)한 통일의 합창에는 동조하지 않으려 한다. ▼ 동포아픔 나눌 수 있어야 ▼ 그것이 우리의 대북정책의 결과는 될 수 있어도 목적이 될 수는 없다. 우리 대북정책의 일차적 목표이자 궁극적 목적은 해방 후 국토가 분단되면서 자신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운수가 나빠서 38선 저쪽에 살게 된 불행한 북녘동포, 정신적 자유도 물질적 여유도 누릴 수 없는 이름없는 불쌍한 2천만 북녘동포를 조금이라도 사람답게 살도록 해주자는 것이다. 이름높은 「위대한 영도자」나 「지도자 동지」와 만나 「정상회담」을 해보겠다고 서둘러대며 유명한 미전향 간첩을 북으로 보내줘 헤식은 「인도주의」나 시위해보려는 소영웅주의자는 안된다. 그런 사람이 아니라 익명의, 무명의 2천만 북녘동포 전체의 인간적 실존을 생각하는 사람, 그들이 겪고 있는 고통과 슬픔을 나의 고통, 나의 슬픔으로 느낄 수 있는 「컴패션」을 가진 사람, 그러한 사람이라야 통일의 시대를 이끌어갈 대통령감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그런 사람을 어떻게 알아본다는 말인가. 휴전선 이북까지 멀리 갈 것도 없다. 우선 이 남쪽에서 소외받은 사람, 소외받은 계층, 소외받은 지역에 대해서 그들의 아픔과 슬픔을 진정 나의 아픔과 슬픔으로 느끼지 못하는 사람, 그런 사람은 날이면 날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소리높이 외쳐대고 있어도 통일시대를 이끌어갈 대통령감은 못된다는 것이 분명하다. 최정호<연세대교수·언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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